[위빳사나명상수행일지] 10일 차 - 무상함과 기쁨

기쁨은 평정심과 공존할 수 없을까?



본 글은 진안에 위치한 '담마코리아 명상 센터'에서 위빳사나 10일 명상코스를 체험한 후 적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수행일지입니다. 담마 혹은 위빳사나 명상과는 다른 필자 개인의 의견이 첨부되어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위빳사나 명상을 앞두신 분께는 이 글을 통해 선입견이 생기지 않도록 명상이 끝날 때까지 이 글을 읽지 않으시길 권고 드립니다. 위빳사나 명상가분의 피드백과 체험 공유는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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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는 죽음의 기술, 즉 평화롭고 조화롭게 죽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삶의 기술을 배움에 따라 죽음의 기술까지도 배웁니다. 삶의 기술이란 지금 이 순간의 주인이 되는 방법,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상카라를 만들어내지 않는 방법,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지금 현재가 좋으면 현재의 산물인 미래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는 좋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엔카의 위빳사나 10일 코스, SN 고엔카, 65p



이 수행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측면은 마음의 의식 차원과 무의식 차원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보통 의식적 마음은 무의식적 마음에서 경험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무지에 의해 감추어진 반응들은 무의식적 마음에서도 일어납니다. 그 반응들이 의식적 마음으로 올라올 때, 그것들은 너무나 격렬해져서 마음을 쉽게 전복시킵니다. 이 수행에 의해 마음 전체는 의식하게 되고 깨어있게 됩니다. 무지는 사라집니다.


이 수행의 다른 측면은 마음의 평정입니다. 경험하는 모든 것, 모든 감각에 대해 깨어있되 반응하지 않고, 갈망이나 혐오에 의한 새로운 매듭을 맺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처음에 앉아서 명상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감각에 반응하는 데 써버리지요. 그러나 격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아주 짧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은 마음의 습관을 바꾸는 데 아주 효과적인 순간입니다. 점차적으로 여러분은 통증이란 사라질수밖에 없는 아닛짜anicca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여, 어떠한 감각을 만나더라도 웃음 지을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
-고엔카의 위빳사나 10일 코스, SN 고엔카,66p







침묵이 해제되기 전 마지막 명상 날이 밝았다. 악몽을 꿨다. 신부님이 된 A와 닮은 아이와 교실에 있었다. 선생님이 그 애 가방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칼을 꺼내 그 아이의 목을 쳐버렸다. 피가 미친 듯이 났다. 그 일이 벌어지기 직전 이미 나는 외면하고 시선을 돌려 도망쳤다. 무섭고 끔찍했다. 그날 새벽엔 명상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명상을 하면서 생각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동안 글에는 많이 티가 나지 않지만 평정심을 찾아가는 동시에 그것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머리로 생각을 하고 생각을 처리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다시 확인한 게 많았다.



첫째로 휴먼디자인에서 보듯이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머리를 지니고 있다. 외부 자극 없이도 내 두뇌는 쉬지 않고 생각을 수신하고 해석해서 내게 전달한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하는 종류의 생각에만 반응한다. 그래서 내 수신기에 맞지 않는 생각은 내게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일관성이 있거나 고집이 센, 나를 고수하는 사람이고, 조금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꽉 막히고 편협한 생각의 흐름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둘째로 나는 이기적이고 온통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생성하는 모든 에너지를 나를 알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알고 싶은 것에만 쓰고 싶다. 그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이건 사회적으로 예의를 지키느냐, 도덕을 지키느냐, 배려를 하느냐 등 대인관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명상을 하고 어떠한 경지에 오르면 자아가 완전히 용해되고 더 이상 자신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고 읽고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위빳사나 명상을 하면서도 나를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나를 알아갈 수 있어 고통의 시간조차도 행복할 뿐이다. 여전히 온통 내 생각뿐이다.


셋째로 끊임없이 모든 현상을 파악하기 앞서 이론적 생각의 틀을 정립하는 방식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 있어서 엉성하거나 틀리더라도 사고로 이것은 이것이고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기준을 세운 후 경험으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다시 이론의 틀과 설명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살 때 깊은 만족과 안정감을 느낀다.



머리로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저 무작정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너무나 힘이 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처음 위빳사나를 수행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리를 모르고 행하는 건 내게 너무 힘겨운 일이다. 그럴수록 미친 듯이 이유와 의미를 찾는다. 누군가 이런 생각을 멈추라고 하거나, 이론의 정립을 못하게 막거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아마 나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 있어, 명상이란 생각을 없애거나 단순화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이 흘러가게 놔두고, 그중 명료한 생각들을 건져 통합하는 과정을 강화해주는 것에 가깝다.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거짓과 편협한 생각을 구분하게 해 주고 오래 간직하거나 알고 싶었던 생각, 내 가치관이나 이론, 신념이 되어줄 적합한 생각을 선별하게 만든다.



내게 명상은 생각을 더 잘하게 해주는 기술이다. 물론 그것은 열심히 머리 터지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회의실에서 억지로 머리를 짜내는 것과는 반대의 활동이다. 무엇이든 그저 흘러들게 놔두면 알아서 채가 걸러지고 필요한 생각이 지나가면 놓치지 않고 딱 잡아낸다. 내 에너지는 거의 들지 않고 성취감을 느낀다.



이렇게 쓰고 보니 명상은 그 사람이 그 사람다운 인생을 정립하는 데 맞는 색을 덧칠해주거나 강화해주는 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과정은 덜어내고 비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개별적인 경험을 하고, 일회적으로 ‘아 좋다. 즐겁다. 힘들었다.’ 이렇게 느끼고 끝내 버리거나 보내 버릴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얼 하든 내가 이미 나라는 걸 알고 있고, 내가 어떻게 변할지 나 조차도 모를 만큼 열려 있는 존재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가 열려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기에 더 지독하고 철저히 나를 규명하고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를 통합해서 어떤 틀과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지 언어로 껴 맞추며 기뻐한다. 그게 내 삶의 작동 방식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다.





위빳사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을 통해 알고 싶은지도 몰랐지만, 무의식 속 알고 싶었던 많은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고 심오한 깨달음도 여럿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점도 커졌다. 위빳사나 명상과 위배되는 나만의 신념과 철학들이 있었고 그것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특히, 기쁨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평정심을 얻기 위해서는 불쾌한 감각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아니 되고 기분 좋은 감각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불쾌한 것과 기분 좋은 감각은 곧 사라지는 무상한 감각이기에 둘 다 썩 중요하지 않았다. 감각에 휘둘리지 말고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고 고엔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하다. 관찰해보니 영원한 감각이란 건 없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인지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한다. 고정된 실체는 환상이다. 고로 세상과 세계는 무상하다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내겐 이것이 ‘모든 것이 변하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찬 의미로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고 우리는 모든 것이라고. 무상함은 무한함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게 누군가에겐 말장난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진심으로 무상함은 내겐 허무함은커녕 그 어떤 말보다 더 근사하고 위대한 희망으로 느껴진다.




평정하면서도 기쁨을 쫓아도 될까? 집착은 나를 괴롭게 하지만 집착 없이 기쁨을 누리고 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위빳사나에 위배되는 걸까? 고통이 어쩔 수 없단 것도 알고 살다 보면 불쾌한 감각과 고통이 생긴다는 것에 마음 아파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기쁨에도 심드렁하게 반응하며 마음껏 기뻐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또 그게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쁨에 너무 기뻐하다 보면 기쁨이 사라졌을 때 아쉬울 수 있고 평정심을 가지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위험성 때문에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집착하지 않고도 마음껏 기뻐하는 길, 평정심을 지니고도 기쁨을 추구하는 길로 가고 싶었다.





비눗방울 놀이를 떠올린다. 불면 커졌다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며 기쁨을 선사하고는, 금세 사라지는 연약한 비눗방울. 그 비눗방울을 보며 영원하지 않은 넌 아무것도 아니고, 어차피 없어질 거 왜 존재하냐고 물을 수가 있을까? 괜히 불었다 후회하거나 비눗방울이 사라진다고 울거나 서글프거나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걸까?



비눗방울의 순간의 유효성이 비눗방울을 부는 기쁨을 조금도 퇴색시키지 못한다. 비눗방울은 금세 사라지고 영원할 거다. 그렇지만 그걸 알면서도 누구보다 기쁘게 비눗방울을 불 거다.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기꺼이. 그렇기에 더 기뻐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즐기고 찬양할 거다.




기쁨을 조금도 포기하지 못하겠다. 이 기쁨이 영원히 오래가지 않을 걸 알고 있다. 그걸 계속 쫓는 게 불가능하단 것도 안다. 내겐 평정심이 기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쁨을 더 기쁘게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집착하지 않고도 기쁨을 추구하며 살고 싶다. 기뻐할 거다. 기쁜 순간에는 마음껏 기뻐할 거다. 잠시 후 모조리 사라질 비눗방울을 불며 너무 기뻐서 활짝 웃으며 춤을 출 것이다.



그게 위빳사나가 아니라 해도, 담마가 아니라고 해도 춤을 출 것이다. 내게 비눗방울은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순간이지만 영원이니까.


2022년 5월 21일 토요일,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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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상카라가 무엇인가요?

정확한 정의를 찾을 수가 없어서 검색해서 덧붙이자면,
일반적으로는 '마음의 작용, 반응' 혹은 업(kamma)과 동의어로 여겨집니다.
무지나 갈망과 관련하여 윤회를 지속시키는 능동적이고 의도적인 형성이라고 하네요.

제 식대로 이해한 방식을 적어보자면, 사람마다 감각을 경험하며 지니게 되는 독특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강한 반응이, 각인이자 흔적으로 남아 이후 유사한 상황에서 반응을 연이어 경험하게 하는 무의식적 작동 기제라고 생각합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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