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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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전투 경과의 개요

6월 28일의 정황(부도 제19 참조)

육군본부는 전선 각 부대에 적절한 지시도 없이 28일 02:30 한강 교량을 폭파한 후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전선 각 부대는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 되고, 각급 부대는 지휘계통을 잃어 혼란 분산되어, 각종 중화기를 유기하고 각개로 한강을 도하 하였다. 재수원 육군본부에서는 동일 12:00 김홍일 소장을 시흥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이응준 소장을 수원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부대 수습(收拾)과 한강 방어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김홍일 소장은 수명 즉시 단신으로 시흥 육군보병학교에 도착하여 기존 부대 수습에 임하고 있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김백일 대령과 협의하여 이미 수습한 병력으로써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부대 수습과 아울러 동 지구 방어에 착수하였다. 당시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 및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각각 그 사령부 막료(幕僚)와 사단 일부 직속부대를 인솔하고 도하, 도착하였으므로 제7사단을 노량진에, 수도사단을 영등포에 각각 배치하여 한강 경계에 임하게 하고 김포지구경비대 대장 계인주 대령으로 하여금 김포 비행장 경계와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 섬멸에 임하게 하였다. 이때에 비교적 완비한 장비로써 도하하여 온 기갑연대의 주력은 노량진, 영등포, 소사지구 강안과 경인가도의 순회 경계에 임하게 하고 일부는 김포지구에서 원거리 정찰 및 연락에 임하게 하였다. 28일 밤까지 수습한 병력 약 1,500명을 혼성 3개 대대로 편성하여 제7사단에 2개 대대, 수도사단에 1개 대대를 편입시켜 한강 방어를 강화 시켰다. 당일 전 장병은 부대 개편, 방어진지 구축 등에 불면불휴(不眠不休)의 노력을 다 하였으나 장병은 개전초 일부터 전세 불리로 인한 무질서한 후퇴와 급식 결핍으로써 피로 극도에 달하여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고, 각 사단은 소수의 병력으로서 일선 수비에 임하고 있었으므로 사령부에서 민간인을 동원, 시흥 및 안양의 2개소에 취사장을 설치하여 일선까지 운반 급식하게 하였으며, 전 장병이 주먹밥에 소금과 물로써 아사를 면하고 있었다.

6월 29일의 정황

적은 점차 한강 북안에 진출하고 마포, 신촌, 용산 관사 지대에 중화기부대를 배치하여 강력한 중포 엄호하에 일부 병력으로써 흑석동 및 철교변, 저수지 일대에 도하를 감행하였으나 대안에 배치된 아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 약 1개 연대는 김포 비행장에 침투해 왔으므로 아 김포지구전투부대는 이를 극력 저지 적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 중 지휘관이 실종되자 참모장 지휘하에 교전을 계속하였으나 우세한 적 공격으로 말미암아 아군은 분산되었으며, 그 후 증원된 기갑연대 제1대대와 합류하여 부평 북방 4㎞ 지점까지 남하한 적과 교전 끝에 김포 남방에 철수하였다.

6월 30일의 정황

전야 도하한 적의 일부 병력은 01:30 아 제7사단 전면 방어 진지를 돌파 남하하여 왔으므로 제7사단은 혼란 분산되어 시흥까지 철수, 시흥지구전투사령부 본부에서는 사령부 전 장병을 동원, 철수한 제7사단 병력을 수습 재편성, 노량진 방면에 진출 교전 끝에 적을 완전 격퇴하였다. 김포지구의 적 병력은 점차 증가 되어 약 1개 연대로서 그 전위부대는 김포지구부대 정면에 공격을 가하자 아군은 적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 중 전세 불리하여 소사를 중심으로 경인가도 이북 오정리 일대까지 철수하여 남하하는 적에 계속 저항하였다. 또한 적의 1개 연대는 난지도를 경유, 작산 방면으로 도하하여 아군의 좌측배에 위협을 가함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서는 임충식 중령을 김포지구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혼성 제2대대(제18연대 소속)를 소사에 증파 진출시키고 문산지구로부터 철수한 아 제1사단을 약대리 우측에 아 제5사단 제15연대는 신정리(新亭里) 우측에 배치되어 김포지구로부터 남하하는 적에게 대타격을 주었다. 한편 아 제1사단과 제5사단 제15연대는 행주 방면에서 철수하는 아군과 합류하여 김포지구에서 동진하는 적과 교전을 계속, 아 김포지구부대 엄호하에 시흥에 집결, 사령부 예비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지휘계통을 확립하기 위하여 부대를 정리, 혼성부대를 원소속대로 재편하였다.

7월 1일의 정황

야간을 이용하여 흑석동, 상도동, 여의도로 도하한 적은 한강에 교두보를 설치하고 가교 가설 및 절단된 철교 보수작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김포 비행장 부근에는 적 기마대, 기갑부대, 보병, 포병의 혼성부대 약 1개 사단이 도하 집결하여 김포 부평가도를 제압하고 남하, 난지도로 도하한 적 1개 연대는 신정리 정면에 진출하였다. 총참모장 명에 의하여 제1사단은 육군본부 예비대로서 수원에 이동하고 제5사단 제15연대는 여월리, 고척리 간에 배치, 김포지구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였다. 한편 인천에는 적의 오열이 침입하여 폭동을 야기하였다는 정보를 접하고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육본 작명(별 제1호에 의거) 제15연대 1개 중대를 급파하여 폭동을 진압시켰다. (주 부록 제 15 육본 작명(별) 제 1호 참조)

7월 2일의 정황

당일은 천후 불량으로 국련 항공대의 활동이 정지됨에 이르러 적은 강력한 포병 엄호하에 하오부터 도하를 개시하여 오자 이에 대비하고 있던 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적을 일시 격퇴시켰으나, 적은 야간에 이르러 도하에 성공, 여의도에 1개 연대, 노량진에 1개 연대와 전차 8대가 출현 아군은 이에 계속 저항하여 고전 끝에 아 제7사단은 대방동 선 고지를 확보하게 하고 아 수도사단은 구노리, 안양천 좌측 고지를 확보, 경비에 임하게 하고 공병대로 하여금 대전차 육박공격대를 조직하여 각 요소에 배치하였다. 제5사단 제15연대를 주력으로 한 김포지구부대는 종일 적과 교전, 적의 일부 병력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24:00부터는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 걸쳐 아 제7사단이 역습하는 전투 외에는 전 전선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군은 다음날 08:00를 기하여 국련 공군 지원 하에 일대 반격을 결심하고 예하 부대에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7월 3일의 정황

08:00 반격전은 전개되었다. 대기하던 공군 지원은 전혀 없고 도리어 적기 편대가 노량진, 영등포 방면에서 반격하는 아군에 대하여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해 왔으므로 아군의 반격은 좌절되고, 다만 오류동, 소사 방면의 공격만이 약간 진전되고 있었다. 적은 전차를 선두로 노량진 수도 육군병원에서 제7사단 사령부에 공격을 가하고 타의 일부는 영등포 로터리에서 남진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를 공격함에 아군은 전투사령부와 연락이 단절되고 소사 방면의 아군은 부평으로부터 남하한 적 1개 사단의 내습으로 경인가도 이남으로 철수, 계속 저항하는 한편 아 제7사단과 수도사단은 남하 공격하여 오는 적에 당황, 삼막동(三幕洞) 부근에 철수하고 전투사령부는 14:00에 안양으로 이동하고 삼막동 부근에 집결한 아군을 재편성하여 수도사단은 삼막동 덕안리 선에, 제5사단 제15연대는 장절리, 양지리 선에, 제7사단은 안양 동측 고지로부터 필동에 이르는 선 일대에 각각 배치하였다. 전투사령부에 편입된 아 제2사단의 2개 대대 율천 남방 만현리, 응봉리에 배치하여 율천으로부터 남하하는 적을 경계하게 하는 동시, 제2사단 주력은 민백리, 호계리, 명학리에 배치하였다.

7월 4일의 정황(부도 제20 참조)

적은 이른 아침 전차 12대를 선두로 삼막동 수도사단 정면과 양지리 아 제5사단 제15연대 정면 및 아 제2사단 일부 정면에 각각 공격을 가하여 10:00 아군 진지를 돌파, 명학동 아군 제2사단 부근까지 공격하여 오자 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09:00 전투사령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고 계속 공격하여 오는 적에 대하여 극력 저항하면서 수원 방어에 최선을 다하였다. 11:00 육군본부는 수원에서 평택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국련 결의 하에 한국전선에 참전한 미 제24사단 선견대가 오산 북방에 도착,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아 전투사령부와 전선 각 부대는 야간에 이르러 수원을 포기하고 평택으로 철수 집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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