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름통,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

in zzan3 years ago

화면 캡처 2021-12-11 224353.png

늙은 싱크대
찌들고 빛바랜
플라스틱 거름통은
들려져서 뒤집힐 때
한 세상 끝난 줄 알았다
곰팡이와 득실거리는 세균을 안고
더러워서 버려지는 걸 받아들였다

더는 걸러낼 일 없는
못난 거름통은
그동안 자신을 받아준 스텐 싱크대에게
끌어안고 살아줘서 고맙다, 인사할 힘조차 없었다
억센 철수세미가 까끌까끌 닿자
어어어, 의아한 채 살갗 벗겨져도 좋았다
죽어도 여한 없을 정도로 좋았다
박박 문지를 때마다 미끄덩대던 묵은 때 씻었다
묵은 슬픔 벗어던졌다
고약했던 냄새 떨쳐냈다
미칠 듯이 좋았다

다시 저 캄캄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
딱 맞게 들어가 찌든 슬픔 걸러내리라
절망 따윈 막힘 없이 흘려보내리라
수돗물 온몸으로 받아내며 콸콸거리리라
어깨 들썩이며 근심걱정 다 걸러냈다
악다구니 다 흘려보냈다
플라스틱 거름통은
철수세미에게 고맙다고 말해서 좋았다
다시 구멍 속에서 살기로 했다
버려지는 찌꺼기를 다 받아주며 잘살기로 했다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

2021.12.12.
@Jami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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