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술친구, 남편

in zzan3 years ago (edited)

"오늘 저녁먹고 들어간다."

사무실에서 몇 건의 코칭통화를 하고 나니 남겨져 있는 남편 톡입니다. 오늘까지 3일째 저녁식사를 바깥에서 하는군요. 화요일은 동네 주민들 정모라고 늦고, 어제는 친구부부와 게임을 하고 늦게 왔고(하긴 저도 같이 했군요) 오늘은 누구를 만나는지 모르겠지만 11시가 다 된 시간인데 언제 온다는 연락도 없습니다.

부부 둘만 살다보니, 그리고 각자 사회생활을 했던터에 서로의 일정에 대해서 별 제약을 두지 않습니다. 저도 약속이 있으면 12시가 넘기 일쑤니까요. 남편은 더더욱 그렇죠. 그리고 좀 늦는다고 해도 연락을 하지도 않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들어올까.... 다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주량이라 좀 줄이면 좋겠는데, 횟수만 줄이면 좋겠는데 하죠..

결혼한지 이제 막 10년이 넘었습니다. 제 나이에 비해 엄청 늦은 결혼을 했거든요. 40이 넘어서 했으니까요. 제 친구는 졸업하고 1년만인 23세에 가장 빨리 결혼을 했습니다. 나머지 친구들도 26세, 27세에 했죠. 90년대는 다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일한다고 바빠서, (남들은 눈이 높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성에 별 관심이 없어서, 이성보다는 일이 더 좋아서, 기타등등의 사유로 인연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아는 분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서로 바빠서 만날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12월 31일 마지막 날 미팅을 하기로 했죠. 그것도 오후 5시.. 찻집도 아닌 지하철 지하 개찰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무척이나 추웠죠. 제가 좀 늦게 갔고, 남편은 기다리다 손이 시려 장갑을 샀다고 합니다.

남편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왜 나를 만나. 오늘도 텃네..'
'한 해의 마지막 날, 이렇게 집에 돌아가서 혼자 한 잘 하느니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 할까?'

에라 모르겠다, 안한다면 맥주나 사들고 집에 들어가지 뭐... 하는 마음으로..

"밥은 그렇고, 한 잔 할래요?"

"그러죠 뭐, 집에 가서 할 일도 없고..."

이렇게 한 잔으로 이어진 술자리가 해를 바꾸고, 자리를 바꿔가며 이어졌습니다. 12월에서 1월로 이어지는 추운 날 새벽, 과메기를 찾아서 서울 서쪽 귀퉁이 술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만나고, 나이가 나이라서 뭘 더 재냐, 결혼을 결정했죠.

양가에서는 나이 많은 똥차들이 서로 구제를 했다고 반대니 뭐니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준비할 것도 별로 없었어요. 두 집 살림을 하나로 합치니 정리하고 버릴 게 더 많았죠. 각자 20년 가까이 자취를 한 터라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으니까요.

결혼하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가족을 만들어 볼 거라고 전국의 병원과 한의원을 다 돌아다녔는데, 결국 둘 만입니다. 때문에 많이도 울고, 많이도 싸웠네요. 참 까칠해지더라구요. 이 이야기도 눈물이 서말이긴 한데... ^^

서울에서 부산으로 삶의 터전도 옮겼고, 시아버님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추석전날 엠뷸런스로 서울까지 가기도 했고.. 그리고 둘 다 직장을 그만두고 각자의 일을 시작했고요. 남 밑에서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싯점에 40일 손잡고 유럽여행을 다녀왔지요. 1주일 웃고 다니고 나머지는 술 마시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술마시고 다녔군요. ^^

지금도 여전히 남편과는 가장 좋은 술친구입니다. 집에 술이 떨어질 날이 없어요.^^

맥주캔.jpg
치워도 치워도 계속 쌓이는 깡통들

이제는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서로 너무너무 바쁘게 살았거든요. 앞으로는 함께 즐길 시간을 많이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만 조금 천천히 살면 됩니다. 남편은 늘 제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는 사람이라서요.

앞으로 조금 더 행복하게 즐기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cjsdns님의 이벤트가 남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군요. 좋은 생각을 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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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손잡고 유럽여행... 요게 가장 부럽네요.
아이 하나 키워본 저로서는 아이 없는거 괜찮습니다.
당연히 이런 말이 하나도 위로는 안되겠지만서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고,
갖지 못한 것을 더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고...
앞으로도 알콩달콩 멋지게 사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네. 맞아요.
없으면 있는게 부럽고,
있으면 없는 게 부럽고...

둘이서 그냥 아웅다웅 하고 살고 있습니다.
있는 거 다 쓰고, 재미있게 살다 가려고요.^^

"있는거 다 쓰고" 와우 멋집니다^^
저도 애 없었다면 그다지 걱정이 없었을텐데...
있는거 다 쓰고 싶어요 ㅠㅠ

부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술친구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술이 떨어질 날이 없어요. ㅎㅎ
함께 한 시간의 길이가 정을 만드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게 있다는 건 행운인 듯합니다.
주당부부, 반갑습니다~~

주당부부 ㅎㅎ 부럽네요~~~
저희 마님은 주당남편에 도끼눈을
가지셨답니다^^

아이고.. 아쉬우시겠어요..
제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좀 있긴 하세요..

그래도 집에서 마시는 술값은 굳으시겠는데요??

마님이 캔라거맥주는 음료수로 아셔서
집에서도 목은 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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