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소설] 할아버지 기억
- 만주 마적단
"할아비는 말(馬)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끊으신 줄 알았던 담배를 입에 무시며 할아버지는 나지막이 이야기하셨다. 순간 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민망함에 ‘도라지’라는 낯선 상표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의 가장자리로 다시 초점을 옮겨왔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는 없으시지만 가끔씩 들려주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좋았다. 종종 이전에 하셨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실 때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실 게 분명해 보였다. 담배꽁초가 재털이 가장자리에 비벼지기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말이 왜 무서워요? 전쟁 때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나 끝도 없이 적군이 밀려올 때, 아니면 죽은 척하고 누워있는데 두더지가 나타났을 때가 더 무섭지 않으셨어요?"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 조금 과장해서 물었다. 짐짓 무표정으로 나를 한 번 스윽 훑어보시고는 느긋하게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신다. 이내 담배보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는지 붉게 타오르던 장초를 손가락으로 눌러 끄셨다. 내 손가락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내 표정과는 상반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은 할아버지는 천천히 입은 떼셨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는 어둠을 사무치게 원망했다. 그때 나이가 7살 즈음이었다. 80년하고도 몇 년을 더한 아주 오래 전 일이라 내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니 기억할 수밖에 없다.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나는 만주에서 마적단에 쫓기고 있었다. 그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를 척살하기 위해 왜놈들은 종종 만주의 마적단과 결탁하곤 했었다. 또한 내부에서 같은 조선인을 밀고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피난길에 나서는 건 더러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우리의 피난길은 결코 예전 같지 못했다.
사실 만주벌판에서 말을 탄 마적단을 피해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한 일이였다. 그들은 기동성뿐만 아니라 추격술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달라붙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마치 이리떼 같은 족속들이었다. 그나마 주변 지리에 밝고 은폐에 숙달한 아버지 덕에 버텨왔지만 더 이상 방도가 없어 보였다. 함께 떠나 온 피난민들이 벌써 반 이상이나 이탈되고 말았다. 잠시 수풀 속에서 숨을 고르던 아버지가 찬찬히 가족을 둘러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대하야. 조금만 더 가면 강이 나올 거다. 이 날씨에 물살까지 거세서 마적단이 더 쫓기는 힘들끼라. 이제부터 니가 가장이니까...... 어머니랑 동생 잘 보살펴야한다."
바로 코앞에서도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었지만 아버지의 눈에 고인 이슬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입술 위로 흩어지는 짭쪼름한 물방울에 입술을 꾹 깨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의 어깨를 두드리던 아버지의 두터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무어라고 말했지만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듣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고백이었다. 나도 당신을 존경한다고, 사랑한다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마적단 대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어둠을 깨뜨리는 총격 소리와 마적단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가슴에 큰 바위가 얹어진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마적단들이 아버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말 발굽소리가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수의 마적단은 끈질기게 우리를 추격했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강줄기는 반가웠지만 지척까지 접근한 마적단은 우리를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 엉크러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형이 말했다.
"소하야. 여기 수풀 속에 꼼짝 말고 있어라. 어머니 손 꼭 잡고 있어야 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형도 곧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려는 것을......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형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형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마치 ‘나 여기 있다 빌어먹을 마적단새끼들아!! 어머니와 동생을 내비 둬라’라는 저항소리처럼 들렸다. 한참 동안 물소리와 총소리가 뒤척이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참고 있던 눈물이 잠기다만 수도꼭지처럼 자꾸만 새어나왔다. 지척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말 호흡소리와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말발굽 소리에 눌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걸까? 나라를 수탈한 왜놈일까? 아니면 사람 목숨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쉽게 거두어가는 마적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의 안위보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아버지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일까?
이런. 내가 미쳤나보다. 그 분들을 욕 되이다니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나라 잃은 백성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우리 조국이 병들고 힘이 없어 그런 것일 뿐 그분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가족이다. 우리의 친절한 이웃이고, 나라의 위대한 영웅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내가 먼저 갔어야했는데...... 서방님 대신, 우리 대하 대신 내가 갔어야했는데......”
심하게 앓다가 겨우 기력을 회복하신 어머니는 그날을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 두셨다. 남편과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과 자식을 먼저 보낸 죄책감으로 남은 생을 보내셨다. 며칠 후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나라도 지켜야한다면 남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참을 내려온 후 우리는 강원도 홍천에 자리를 잡았다.
- 피난 길
증조부님과 큰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예전에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제사는 같은 날 치루는 게 옳았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는 한참 후에 돌아가셨는데 같은 날 제사를 치루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우연히 같은 날 돌아가셨다고 믿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내 궁금증은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언젠가 제사상을 도와드리다가 할아버지께 물었다.
“할아버지. 증조할머니는 만주에서 넘어오시고 오랫동안 할아버지랑 같이 지내셨죠?”
“글치. 내 6.25 참전할 때까지 살아계셨지.”
“그럼 증조할머니도 증조할아버지랑 큰할아버지 기일에 돌아가셨어요?”
“......”
부산스레 제사상을 준비하시던 할머니께서는 조용히 부엌 밖으로 나가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사라진 곳을 한참동안이나 안쓰럽게 쳐다보시다가 천천히 말문을 여셨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부터 울려 퍼지는 포성에 서울 인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졸이며 방안에 숨 죽여 있었다. 천근같은 무거운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동이 터서야 사람들은 북괴군이 남침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세간살이를 바리바리 챙겼다. 하지만 어머니는 너무나도 홀가분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며칠간 챙겨먹을 수 있는 음식과 새벽이슬을 막을 수 있는 외투가 다였다. 만주에서부터 이어진 피난생활에서 우리가 얻은 건 생존본능이었다. 불필요한 짐은 체력만 소모할 뿐 끝을 알 수 없는 피난길에 쓸모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와 순례도 피난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순례 부모님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동시 다발적으로 남침하는 북괴군의 성향을 봤을 때 전쟁이 길어질 것이고 춘천보다는 남쪽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순례 부모님은 금방 전쟁이 끝날 거라며 가까운 곳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순례 부모님과 오빠는 춘천에 사는 작은 삼촌내로 가려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나와 순례는 어머니를 모시고 순례 여동생 내외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순례 아버지는 딸을 잘 부탁한다며 끼고 있던 은가락지를 나에게 건내 주었다. 함께 마을을 빠져나오면 좋으련만 혹시라도 지척에 다가온 북괴군에게 가족들 발목이 잡힐까 염려스러웠던 나는 순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금방 뒤 쫒아 갈 테니 엄니 잘 모시고 먼저 내려가시오.”
순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부모님이 함께 춘천으로 가자고 해도 나를 따라나설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다. 나를 믿고 어머니를 깍듯이 모시는 순례라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 어머니와 함께 무탈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마을청년들과 함께 사람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을에 잔류했고 후에 국군에 징집되었다. 어려서부터 만주에 거주했던 나는 형을 따라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영어를 특히 좋아했었다. 비록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영어가 유창했던 나는 운이 좋게도 미군 부대로 편입되었고 미군과 국군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순례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나서는데 넉넉한 집안의 여식으로 곱게 자란 그녀는 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더욱이 나이든 시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상황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기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북괴군의 포탄도 포탄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무서웠던 건 물 밀 듯이 쏟아지는 피난민의 행렬이었다. 순간의 방심이 피난민의 발길에 파묻혀 비명횡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 제 손 꼭 잡으시어요. 절대로 손을 놓으시면 안돼요.”
기력이 다한 상황이었지만 순례는 나와 한 약속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강물에 흘려보내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형님과 어떻게 헤어지셨는지. 그리고 어머니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순례는 지금 어머니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도 현실은 그들 상황을 고려해줄 만큼 녹록치 않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난민의 행렬에 이끌려 그저 걷고 걸을 뿐이었다. 아낀다고 아낀 음식도 이제는 곧 동이 날듯했다. 순례도 어머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둘 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것 좀 더 드세요. 저는 동생 내외랑 조금 챙겨 먹었더니 입맛이 없네요.”
순례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머니는 달리 어떤 말을 꺼낼 방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마치시고는 어둠을 이불 삼아 곤히 잠이 들었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에 새벽부터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했다. 공포에 짓눌린 피난민들의 발걸음 빨랐다. 자칫 잘못 발을 디뎌 넘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북괴군보다 피난민의 발에 먼저 밟혀 죽을 판이었다. 순례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는 굳세게 걸어 나갔다. 하지만 며칠째 잠을 설치고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한 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닌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가야. 내가 염치없이 너무 오래 살았다. 그때 서방님 따라 내가 먼저 갔어야 했는데...... 대하를 먼저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이다. 내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가는 거니끼니... 너무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말거라. 소하를 잘 부탁한다. 금실 좋게 살그라.’
어느 순간 맞잡은 손의 온기가 사라졌다. 순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어머니!’
텅 빈 손을 바라보니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돌아가야 했지만 피난민에 쓸려 내려가기만 할뿐 멈추어 설 수도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
순례는 목 놓아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오열에도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갓난쟁이를 가슴에 뭍은 아지매, 포탄에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아저씨, 부모와 헤어져 눈물범벅이 된 코흘리개 어린 아이. 그날 그 피난길에는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제사상을 물리고 가족들이 모여앉아 음복했다. 평소 술을 드시지 않으시던 할머니가 그날따라 유난히 많이 마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못마땅하셨는지 잔소리를 하셨다. 할머니는 취하셨는지 “네에~ 네에~ 알겠어요. 지가 죄송해요.”라고 되뇌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증조할머니에게 하는 말인지 쉬이 구분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이 자책하며 지내셨을까? 이제 그만 그 짐을 내려놓아도 좋을 텐데...... 할머니가 잠 드시고 할아버지께 물었다.
“할아버지. 혹시...... 할머니 원망 많이 해요?”
“안한다. 너거 할머니를 원망했으면 이날 이때까정 어찌 부대끼며 살았겠노. 내 너거 증조할머니도 잘 알지. 분명히 어머니가 손을 놓았을 기라. 자기 명줄 줄이고 우리 명줄 늘려 줄라고......”
할아버지는 장초를 바닥에 서너 차례 툭툭 치더니 입에 무셨다.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보다 할아버지 눈시울이 더 붉어 보였다.
- 소리 없이 강을 건너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포탄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대원 뒤를 바짝 따라 붙어 퇴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앞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괴군 서넛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바닥난 체력에 더 달릴 수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북괴군에게 사로잡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풀이 대상이 되거나 우리군의 총알받이가 될 것이라 짐작했다. 사방이 다 낭떠러지였으나 고민할 새가 없었다. 그저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비탈길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느 한 군데는 부러지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을 걸 각오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몸을 지탱하느라 군데군데 꺽인 나무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반듯하게 부러진 나무 하나를 골라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살았으나 나무는 죽었다. 나는 살았으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씩 떠나간다. 삶이란 참 가벼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살고 싶었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산은 마치 전쟁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적막 속에도 지탱할 나무가 있었다. 나 때문에 이미 죽은 나무지만 이상하리만치 안정되었다. 나무에게 의지한 채 남쪽으로 향했다.
며칠을 헤매도 아군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적군의 눈을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드는 게 최선이었다. 낮 동안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두렵기도 했지만 사실 해가 떨어진 저녁시간이 더 두려웠다.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무에 의지한 채 산길을 따라 그저 남쪽으로 걸었다. 중간에 버려진 민가에서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주위에 가득한 적군,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이 점점 더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한참을 남쪽으로 걷다보니 어느새 널찍한 강이 나타났다. 주위 동태를 살펴보니 강 건너 쪽으로 아군과 대치를 하는 듯 보였다. 드디어 삶에 대한 희망이 나타났다는 기대감이 들었지만 이 엄동설한에 강을 건널 생각이 차마 들지 않았다. 문득 만주 마적단에게 쫓기던 때가 생각났다. 형님이 강물로 뛰어들어 마적단을 이끌어 낸 덕에 여태껏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생명줄도 오늘로써 끝인가 보다. 강물로 뛰어드는 순간 참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군의 총알세례에 벌집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갈 길만 가는 강물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 강물만 넘어서면 생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강을 건너야 했다. 고민 끝에 아이 몸집만한 돌덩이를 들고 강물 앞에 섰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소리 내지 않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낮이었지만 여전히 강물은 살을 에워싸는 듯 차가웠다. 얼굴까지 강물에 잠긴 후에 큰 호흡으로 공기를 잔뜩 들여 마시고는 강물 속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강바닥을 아이만한 돌덩이에 의지한 채 걸었다. 강 아래는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방향감각조차 없었다. 그저 한 발자국씩 힘겹게 내딛으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숨을 참은 후에야 돌덩이를 내려놓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얼굴 위로 내리쬐는 태양빛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혹시나 적군에게 들킬까봐 겨우 입만 내밀어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이쯤이면 거의 다 왔겠거니 싶어 내다보니 아직 반도 건너지 못한 상황이었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강물이 어느 순간 아늑하게 느껴졌다. 돌덩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강바닥에 편안히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칫 수면위로 올랐다가 총알세례를 받고 벌집이 되느니 시신이라도 온전하게 여기서 눈을 감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형님이 떠올랐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순례도 떠올랐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떠오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강물은 내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저 걷고 걸을 뿐이었다. 물살에 쓸려 휘청거릴지라도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윽고 반대편 강가로 몸을 빼낸 후에야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oo중대 oo소대 이소하... oo중대 oo소대 이소하... oo중대 oo소대 이소하...”
며칠 뒤 후방의 한 국군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저체온증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몸을 회복하는 동안 부모님과 형님께 그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돌아 가야할 의미를 부여해준 순례에게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강물 밑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셨어요?”
“거서 헤엄치면 ‘나 여기 있소. 죽여주쇼.’ 하는 거 밖에 더 되나. 살라고 그랬지, 살라고.”
“아니, 잠수해서 헤엄치면 되지 않아요?”
“사실 할아비는 헤엄 못 친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애꿎은 담배연기만 뿜어내셨다.
- 두더지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대구를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던 국군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크게 북진할 수 있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나는 서둘러 소총을 둘러메고 부대로 복귀하여 전장으로 향했다. 회복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본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순례에게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세 좋게 서울을 탈환하고 북쪽으로 전진하던 국군의 사기는 높았다. 금세라도 북쪽의 영토마저 차지하고 통일된 조국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적군은 중공군까지 가세하여 남으로 넘어 들었다. 통일의 고지가 눈앞에 보였던 나는 밀어닥치는 중공군을 피해 남으로 후퇴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아마 모든 병사들의 심정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있는 대로 총알을 퍼 부어도 끝도 없이 밀어닥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소총이 작동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북한지역에서 UN군이 먼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국군 역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국군의 등 뒤로 적군이 바짝 추격해 왔다. 어찌나 악착같이 달려드는지 이대로 가다간 후퇴하는 인원이 모두 전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군이 무사히 퇴로를 확보할 때까지 누군가는 전선에서 버티며 적군의 진로를 차단해야했다. 결국 소규모이긴 하지만 주요 지역에 매복이 결정되었고 나는 매복조로 편성되어 적군의 진로를 막게 되었다.
의외로 매복의 성과는 상당했다. 소규모로 편성되어 기동성이 높았고 매복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전진만을 해오던 적군 선봉대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적군이 당황하여 주춤한 사이 국군은 그만큼의 퇴각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우리의 동태를 파악하고 다시 밀어닥칠 거다. 충분히 시간을 벌었으니 우리도 서둘러 후퇴하자.”
지금이 아니면 매복조의 후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중대장의 말에 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매복조로 편성되었을 때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상황이 예상보다 좋아서 매복조 역시 큰 피해 없이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한 번에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누군가는 또 남아서 매복조의 뒤를 지켜야 합니다.”
소대장의 말에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잠시마나 희망을 맛보았으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이왕 시작한 거 내가 끝까지 있겠심더. 난리 통에 가족들 다 잃어가 갈 곳도 없는데 뭐."
저격수로 있던 송하사가 침묵을 깨고 남기를 자처했다. 순간 대원들이 너도 나도 남겠다고 지원했다. 나 역시 잠시 순례를 생각하며 갈등했다. 솔직히 손 들기를 주저했다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료들 중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가야지.’ 라고 위로하는 듯했다. 그래서 더 그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결국 나 역시 남기로 결정되었다. 얼마 되지 않던 매복조가 반이 줄었다. 이제는 살아 돌아가기 보다는 동료들의 생존을 위해 한 명의 적군이라도 더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본대가 도착한 적군은 선봉대를 정비한 후 어둠을 틈타 다시 남하를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군의 수와 기습에 달리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대원들이 하나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혼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머리를 울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나는 머리의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철모가 심하게 찌그러진 것을 보니 포탄에 튄 돌맹이가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기절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 안도하던 찰나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적군으로 보이는 두 명의 병사가 조금씩 다가오는데 그들의 행동이 조금 수상해 보였다.
푹! 푹!
말로만 듣던 ‘두더지’들이다. 그들은 널부러진 시체들 위를 지나다니며 착검 상태의 소총으로 확인 사실을 하고 있었다. 시체를 관통하는 대검의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달아나야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죽은 척을 하고 누워있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일어나 도망을 친다면 십중팔구 사살될게 분명해 보였다. 더욱이 머리부터 전해지는 통증 때문에 달아날 자신도 없었다. 그저 적군의 피인지 아군의 피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들을 온몸에 덕지 덕지 바른 채 눈앞에 보이는 시체 밑으로 기어들어가 두더지들이 지나쳐가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 온 두더지. 순가 하늘로 솟구쳤다 하강하는 그의 팔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이윽고 날카로운 대검은 내가 덮은 시체의 몸을 꿰뚫고 내 허벅지를 스쳐 지나갔다.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두더지들이 지나간 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일어나 상처를 살필 수 있었다. 큰 상처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산속으로 몸을 옮긴 후 개울물에 몸을 대충 씻고선 곧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북괴군의 추격은 없었고 무사히 순례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먼저 가신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전우들의 가호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늘에 있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더욱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노라 다짐했다.
“어째 할아버지는 매번 죽다 살아난 이야기만 하세요. 용맹하게 적군을 쓰러뜨린 적은 없어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담배연기만 천천히 들여 마셨다.
그 때는 자신의 손에 쓰러진 적군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속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쓴 글을 각색하여 제출합니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니 할아버지가 더 생각납니다. 기일이 되어도 한 번 찾아 뵙질 못해 죄송한 마음이 크네요...ㅠㅠ
아.. ㅠㅠㅠㅠㅠ
오이형 없을 때 부지런히 도전해야지 ㅎㅎ
본격적인 소설로 쓰시면 좋겠습니다
앗! 격려의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용기 백배 되는 하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