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고르넬리오
로마(Roma)의 평범한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이 순교한 후 여러 사정으로 14개월 동안 지연되었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극심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었다. 그는 배교자들에게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한편,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며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를 끝까지 옹호했다. 그리고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황으로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새 교회를 세운 후 대립 교황이 되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던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여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교회회의는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체포되어 첸툼첼레(Centumcellae, 현재 로마의 항구도시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이듬해 6월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에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루치나(Lucina)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라틴어로 새겨진 최초의 교황 비문이다. 교회 미술에서 교황 성 코르넬리우스는 보통 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라틴어 코르누(Cornu : 뿔, 뿔피리, 신호나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곁에 소를 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참고자료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 마이클 월시 저, 변우찬 역, 옥스퍼드 교황 사전 - 코르넬리오, 왜관읍(분도출판사), 2014년, 56-57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 - '고르넬리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4년, 410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230-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