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바울리노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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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는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를 ‘참으로 사도적인 사람’이라 하였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신앙을 위하여 고통을 즐겨 받은 사람’으로 격찬하였다. 그는 30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푸아티에(Poitiers) 주교좌성당 신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트리어의 성 막시미누스(Maximinus, 5월 2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347년경 스승을 계승하여 트리어의 제6대 주교가 되었다.
335년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과 맞서다가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1차 유배를 왔을 때, 성 바울리누스는 그의 최고 지지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트리어의 주교가 된 후에도 아리우스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인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0년 동로마와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된 후 353년 아를(Arles)과 355년 밀라노(Milano)에서 교회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는 초안에 주교들의 서명을 강요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주교를 추방하겠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결국 성 바울리누스는 밀라노(Milano)의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5월 25일), 베르첼리(Vercelli)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8월 2일) 그리고 칼리아리(Cagliari)의 루치페르(Lucifer)와 함께 유배형을 선고받고 추방되었다.
그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로 추방된 지 5년 만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395년 트리어로 모셔와 그에게 봉헌된 성 바울리누스 성당 묘지에 안치되었다.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그의 죽음에 대해 “로마 순교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땅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 프리지아에서, 그는 주님에게 복된 순교의 월계관을 받고 운명하였다.” 그는 신앙의 증거자이자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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