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체사리오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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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년 또는 470년 부르군트(Burgund) 왕국에 속한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의 로마 시민이며 독실한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성 카이사리우스(또는 체사리오)는 18세 되던 해에 샬롱의 주교인 실베스테르(Silvester)로부터 삭발례를 받았다. 그리고 489년 레렝스(Lerins) 섬의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포도주 창고 관리인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엄격한 단식 생활 탓에 건강이 약해지자, 아를로 가서 문법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포메리우스(Julianus Pomerius)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그곳의 주교인 에오니우스(Eonius, Aeonius)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고, 시외에 있는 한 수도원의 지도를 부탁받아 498년 또는 499년에 수도원장이 된 후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
수도원에서 3년 정도 생활하던 그는 에오니우스 주교가 사망한 지 몇 달 뒤인 502년 12월에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교로 선출되어 542년까지 아를의 대주교로 갈리아 남부 지역의 교회 운영을 위한 중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성 카이사리우스는 수많은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싸웠으며, 아를의 성당에서는 매일 성무일도를 노래로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성녀 카이사리아(Caesaria, 1월 12일)와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을 썼으며, 국제적인 몇 차례의 교회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507년까지는 서고트족(Visigoths)의 영향 아래, 508-537년까지는 동고트족(Ostrogoths)의 통치 아래, 그리고 이후에는 프랑크족의 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를의 주교좌에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확고히 지켜냈다. 그는 부르고뉴 왕에 의하여 아를이 공격을 당했을 때 수많은 희생자들을 돌보았으나,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와 동고트족이 아를을 점령했을 때에는 재차 체포되어 모든 직책에서 면직되었다.
그 후 성 카이사리우스는 로마(Roma)로 갔고, 그곳에서 프랑스 지방의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로부터 팔리움을 받았다. 이 팔리움은 서방 유럽 주교에게 허용된 첫 번째 경우이다. 537년 프랑크족들이 아를을 점령한 후에 성 카이사리우스는 성 요한 수도원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다가 8월 27일에 운명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자신의 교구를 40년간 지도하였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였으며, 그의 성덕과 사랑 그리고 능력은 당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529년 오랑주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반펠라기우스설(Semi-Pelagianism)의 단죄에 앞장섰으며, 로마법을 응용하여 테오도시아누스 법전(Codex Theodosianus)의 주요 골격이 되는 '브레비아리움 알라리치'(Breviarium Alarici)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 시민법이 되었다고 한다. 라틴 교부의 한 명인 그의 다른 저서와 설교집도 여러 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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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체사리오, 아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180-8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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