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17(토)역사단편128. 역사를 바라보는 눈. 讀史新論[독사신론](10)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다.
< 출처: 讀史新論[독사신론]>

역사속에서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신채호 선생의 글속에
한문이 너무 많은것을 보고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오늘날 미국말, 일본말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60년전의 영화를 보면

8101.JPG
<출처: 10년 세도, 임권택, 1964>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영상에 한글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 것이다.

지난 글에서는,
선비들의 소모적 논쟁과
종놈들의 논쟁을 동시에 비판했다.

정통성 여부
조정의 지위여부에 관한 논쟁들이다.

시대적 소명이나,
운명의 기로에서 요청되는 결단은 없이
단지 이념적으로 자극만 더할뿐인 논쟁은
집어치워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허망한 분열과 갈등이 바로 그런것이다.

2장 [부여와 기자] 편을 계속 읽어본다.

지난 내용을 보면
'기자는 조선을 정복한것이 아니다.
신하로 임명되어 맡은 지역을 다스렸고
그의 후손중 누군가가
나라를 세웠을 뿐이다.
그것을, 사대사상에 중독된 김부식류의 지식인들이
마치 기자가 나라를 세운것처럼 조작하고
떠받들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역사를 조작한 대표적 사례다.

기자조선에 대한 허구성을 논파하는 선생의 글을
읽어보자.

又或 國人의 謳歌獄訟(구가옥송)이
箕子(기자)에게 自歸(자귀)함으로
檀君後裔(단군후예)가 不得已 避去(부득이 피거)라 할지나,
此亦 不然(차역 불연)하니,
彼 虞舜(피 우순)의 聖도 箕子(기자)에 不下(부하)하나
尙且 四門(상차 사문)에 納(납)하며 百揆(백규)에 宅(택)하여
數載(수재)를 歷誠(역성)한 後에야 其民이 始信(시신)하였거늘,
況 朝鮮人이 箕子(기자)를 猝遇(출우)하매,
其 言語가 不通하며 風俗이 不同하거늘
어찌 壹見에 感服(감복)하여,
千餘年 奉事(천여년 봉사)하던 吾君(오군)의 子孫을 棄(기)하고
不識不知(부식부지)하는 外國人에게 歸(귀)하리오,
故로 檀君後裔(단군후예)가
箕子(기자)를 避(피)하여 北遷(북천)하였다 함은
不成說의 話니라.
<출처: 독사신론>

謳歌獄訟(구가옥송): 재판의 공정함을 찬양함
自歸(자귀): ~에게 돌아감
송사(頌辭): 공덕을 기림
避去(피거): 피해서 떠남
此亦 不然(차역 불연): 이것또한 그렇지 않다.
彼 虞舜(피 우순): 저 우순(=순임금)
不下(부하): ~에 처지지 않는다, 부족하지 않다.
납(納): ~에 바치다
백규(百揆): 모든 벼슬아치
宅(택): 망라하다, 자리잡다
數載(수재): 몇 년간
歷誠(역성): 진실됨을 겪다. 확인하다.
始信(시신): 믿기 시작함
猝遇(출우): 우연히 만남
棄(기): 버리다
不識不知(부식부지): 전혀 모름
北遷(북천): 북쪽으로 도읍을 옮김

(옮기면)
또 혹시
나라 사람들의 칭송과 송사(頌辭)가 기자에게 돌아가므로
단군의 후예들이 할 수 없이 피해서 달아났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이것 또한 그렇지 않으니,
저 순임금의 성스러움도 기자에 못하지 않으나
오히려 사문(四門)에 바치며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수년간의 성의를 다한 후에야
그 인민들이 비로소 믿기 시작 하였거늘,
하물며 조선 사람이 기자를 갑자기 만났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으며 풍속이 같지 않거늘,
어찌 한번 보고 감복하여
천여년이나 받들어오던 우리 임금의 자손을 버리고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에게로 돌아가겠는가.
고로 단군후예가
기자를 피하여 북쪽으로 떠났다라는 주장은
이루어질수 없는 말이니라.
<출처: 독사신론>

又或 箕子(우혹 기자)의 東來가
周武王의 力을 借(차)함인가 하나,
此亦 不然(차역 불연)하니,
夫 周家幅員(부 주가폭원)이 漢武帝 時를 不及(불급)할지며,
周家(주가)의 國力이 漢武帝 時를 不及할지오.
其他 兵甲戰士(기타 병갑전사)도 皆(개) 漢武帝 時를 不及할지라.
漢武帝는 雄威(웅위)가 四隣(사린)을 讋(착)한 敵國雄主(적국웅주)오,
衛右渠(위우거)는 創業이 未久(미구)한 客族 遺孫(유손)이로되,
民心이 不附(불부)하고 國基가 未鞏(미굉)한 中에,
彼의 來使를 斬(참)하여 慢言(만언)을 謝(사)하고,
幾年 血戰이 有하였거든,
況(황) 千年王朝의 遺裔(유예)로,
비록 衰弱(쇠약)이 極度(극도)에 達하였을지라도,
其 强勁(강경)한 氣力이
어찌 彼 衛氏 小虜(피 위씨 소로)에 不及(불급)하리오.
<출처: 독사신론>

又或(우혹): 또는 혹은
借(차): 빌리다
此亦 不然(차역 불연): 그또한 아니다
周家幅員(주가폭원): 그렇다면 주 왕조의 영토
不及(불급): 미치지 못하다
其他 兵甲戰士(기타 병갑전사): 그외에 무장한 전투병
皆(개): 모두
雄威(웅위): 강력한 권위
四隣(사린)을 讋(착)한: 주변국을 두렵게 만든
敵國雄主(적국웅주): 적국의 위대한 군주
未久(미구): 오래되지 않은
衛右渠(위우거): 우거왕(BC. 2세기~BC.108)
遺孫(유손): 후손
不附(불부): 붙지 않다. 따르지않다
未鞏(미굉): 아직 견고하지 않다.
斬(참): 베다, 죽이다
慢言(만언): 함부로말함, 거만한 말
謝(사): 사과하다. 안부를 묻다
遺裔(유예): 후손
衰弱(쇠약): 약해짐
强勁(강경): 강하고 단단함
彼 衛氏 小虜(피 위씨 소로): 저 위씨 오랑캐

옮기면

또 혹시
기자가 동쪽에 온 것이
주나라 무왕의 힘을 빌린 것인가 하나,
이것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릇 주나라의 영토가
한(漢)나라 무제( 武帝)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주나라의 국력이 한나라 무제 때를 미치지못 할 것이며,
기타 병기와 병력도
모두 한나라 무제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 무제는 강력한 권위가
사방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는 적국(敵國)의 뛰어난 임금이요,
위만조선의 우거(右渠)는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않은
나그네 종족(客種族)의 후손이지만
민심(民心)이 아직 따르지 않고
나라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가운데
한나라의 사신을 목베고 거만하게 처신해서
수년 동안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
하물며 천년 왕조의 후예로
비록 그 쇠약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강하고 굳센 기력(氣力)이 어찌
저 위씨 오랑캐보다 못하겠는가.
<출처: 독사신론>

其君이 或 不仁하더라도 其臣이 有할지며,
其臣이 皆 不賢(개 불현)할지라도 其民이 有할지니
壹國內 上下臣民이 會集(회집)하여
先王의 宗廟(종묘)를 忍撤(인철)하며,
先王의 陵墓(능묘)를 忍棄(인기)하며,
先王의 千年 奠居(전거)하던 國都를 忍別(인별)하고,
亡國的 行裝으로 迢迢 去(초초 거)하매
비록 至無恥(지무치)한 國民이라도 壹次 思奮(사분)하리니,
萬壹 百戰力屈(백전역굴)하여 擧國北走(거국북주)라 할진대
猶可也(유가야)어니와,
어찌 樂工·巫女 五千人의 來를 見하고
三拾六計(삼십육계)의 上策을 尋(심)하리오.
<출처: 독사신론>

會集(회집): 한곳에 모임
忍撤(인철): 허물다
忍棄(인기): 버리다
奠居(전거): 정착하여 머물다.
忍別(인별): 이별하다.
迢迢 去(초초 거): 멀리 떠나다
至無恥(지무치): 완전히 부끄러움이 사라지다
思奮(사분): 각오를 다지다
百戰力屈(백전역굴): 많은 전투로 기력이 다함
擧國北走(거국북주): 온나라가 북쪽으로 달아나다
尋(심): 찾다

옮기면

그 임금이 혹 어질지 못하더라도 그 신하가 있으며,
신하가 모두 어질지못하더라도 그 백성이 있을 것이니,
한 나라 안의 위아래 신하와 인민들이 함께모여
선왕의 종묘(宗廟)를 차마 허물며
선왕의 능묘(陵墓)를 차마 버리며
선왕이 천년이나 머물러 살던
나라의 서울을 차마 이별하고
망국의 행장으로 멀리 떠나는 때에
비록 지극히 수치를 모르는 국민이라도
한번쯤은 분발할 것을 생각할 것이니,
만일 수없이 싸워서 힘이 다하여
온 나라가 북쪽으로 도망한다면
오히려 말이 되겠지만,
어찌 악공(樂工)과 무당 5천 명이 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겠는가.

단군이 기자를 피하여 북쪽으로 갔다는 유학자들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불과하고 지적하고 있다.
순진한 백성들과 지식인들을 속이려는
속임수였을 뿐이다.

계속 읽어본다.

設或(설혹)
檀君王朝 末路(단군왕조 말로)의 劣弱(열약)이
果然 此(과연 차)에 至하였을진대,
是時 北方에 在한 肅愼族(숙신족)도 武藝(무예)에 長한 民族也며,
西方에 在한 鮮卑族(선비족)도 戰鬪(전투)에 能한 民族也며,
其他 各 方面에 列立한 沃沮·濊貊(옥저,예맥) 等 族도
木艸(목초)를 逐(축)하여 牧畜(목축)하며
生存을 競(경)하는 民族(민족)니,
檀君王朝의 如此 劣弱(여차열약)함을 見하고
坐視不取(좌시불취)할 理가 豈有(기유)하리오.
然則 箕子(연즉 기자)의 東來를 不待(부대)하여
檀君後裔(단군후예)는 滅亡(멸망)이 已久(이구)하고,
朝鮮 壹方(조선일방)은 他族이 已據(이거)하였을지라.
故(고)로
箕子(기자)가 武王의 力을 借(차)하여
檀君王朝를 代하였다 함은
村夫 口頭(촌부 구두)의 說話에 不過(불과)라 하노라.
<출처: 독사신론>

逐(축): 찾아다니다.
如此 劣弱(여차열약): 이와같이 약함
坐視不取(좌시불취):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다.
不待(부대): 기다릴 필요없다.

(옮기면)

설사 단군왕조 말엽에
쇠약함이 과연 이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 당시 북쪽에 있는 숙신족(肅愼族)도
그 무예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선비족( 鮮卑族)도 전투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기타 여러 곳에 있었던
옥저( 沃沮)· 예맥( 濊貊) 등의 종족도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하면서 생존경쟁을 하는 민족이었으니,
단군왕조가 이와 같이 쇠약함을 보고서도
가만히 앉아서 취하지 않을 이치가 어찌 있었으리요.
<출처: 독사신론>

그런즉 기자가 동쪽으로 오기 전에
단군 후예는 멸망한 지 벌써 오래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한 구석은
다른 종족들이 이미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무왕(武王)의 힘을 빌려
단군왕조를 대신하였다는 것은
농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출처: 독사신론>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존 유학자들의 주장을
조금만 되짚어봐도 말이 안되는 것이었는데
어찌 쉽게 믿었을까...
스스로도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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