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07(수)역사단편118,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건국연대(建國年代)에 대하여(6)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한 논문
마지막 부분을 읽어본다.

長壽王(장수왕) 69년(481)에 魏(위)가 제국의 使邸(사저)를 설치할새,
齊[제: 當時(당시) 支那(지나)는
北魏(북위)와 南帝(남제)의 兩國(양국)이 分立(분립)- 原註(원주)]가 제일이요,
고구려가 그 다음이었으며,
77년에는 고구려가 제일이요 齊(제)가 그 다음이었나니,
이때에 고구려가 제일등국의 國使(국사)로 위에 임함으로
魏人(위인)이 그 國系(국계)를 물어 史(사)에 기록하여,
『후한서』 『삼국지』 이래 지나 사가들이 기재치 않은
주몽 이하 5세가 『위서』에 보임이나, 다만 그 연조를 기록치 않았으며,
모본왕에서 태조까지를 '相傳(상전)' 2자로 생략하여
충분히 我史(아사)의 참고 재료되지 못함이 가석하다.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使邸(사저):외국 사신이 머무르는 집
國使(국사):나라의 사신
相傳(상전): 대대로 이어져 전함
可惜(가석)하다: 몹시 아깝다

(옮기면)

장수왕 69년(481)에 '위'가 제국의 사신들 주거지를 설치할때,
齊[제: 당시 지나는 북위와 남제의 두나라로 나눠져있었다- 원주]
가 제일이요,
고구려가 그 다음이었으며,
77년에는 고구려가 제일이요 '남제'가 그 다음이었나니,
이때에 고구려가 제일등국의 '사신'으로 지위를 차지하고
魏人(위인)이 그 나라의 계통을 물어 역사에 기록하여,
『후한서』 『삼국지』 이래 지나 사가들이 기재치 않은
주몽 이하 5세가 『위서』에 보임이나, 다만 그 연조를 기록치 않았으며,
모본왕에서 태조까지를 '대대로 이어져 전함' 두글자로 생략하여
충분히 우리역사에 참고 재료가 되지 못함이 매우 아깝다.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고구려왕위계승.JPG

그러나 신라인의 삭감한 연대를 약 120년으로 잡고
지나사의 지나 역대 연조와 대조하면
주몽 건국 원년 甲申(갑신)은 한 문제 후원 원년에 상당하며,
유리왕 원년 壬寅(임인)은 한 무제 건무 2년에 상당하며,
대무신왕 원년 戊寅(무인)은 한 무제 태초 3년에 상당하며,
모본왕 원년 戊申(무신)은 한 무제 本始(본시) 5년에 상당하니라.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옮기면)

그러나 신라인이 삭감한 연대를 약 120년으로 잡고
지나사의 지나 역대 연조와 대조하면
주몽 건국 원년 甲申(갑신)은 한 문제 후원 원년에 상당하며,
유리왕 원년 壬寅(임인)은 한 무제 건무 2년에 상당하며,
대무신왕 원년 戊寅(무인)은 한 무제 태초 3년에 상당하며,
모본왕 원년 戊申(무신)은 한 무제 本始(본시) 5년에 상당하니라.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단재의 글과 역사서에 기록된 연대를 표를 통해 비교해본다.
간지연호를 중심으로 비교했다.
건국간지표.JPG
본시는 한나라 선제의 연호다.

유리왕 33년에 襲取(습취)한 漢(한) 고구려현은
곧 한 무제가 衛右葉(위우거)를 멸하고 신설한 4군의 1현이요,

대무신왕 11년에 한 요동태수가 入寇(입구)함은
고구려현의 실패한 辱(욕)을 보복하려 함이요,
대무신왕 15년에 出降(출항)한 樂浪王(낙랑왕) 崔理(최리)는
지금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요 요동의 한 낙랑군은 아니다.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襲取(습취): 습격하여 빼앗다
入寇(입구): 쳐들어오다
辱(욕): 부끄러움 , 수치
出降(출항): 나가서 항복하다.

(옮기면)
유리왕 33년에 습격해서 빼앗은 한나라 <고구려현>은
곧 한 무제가 '위우거'를 멸하고 신설한 4군의 1현이요,
대무신왕 11년에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온것은
고구려현의 실패한 수치를 보복하려 함이요,
대무신왕 15년에 나와서 항복한 낙랑왕 최리는
지금 대동강 부근의 낙랑국이요 요동의 한 낙랑군은 아니다.

계속 읽어본다.

유리왕 31년의 王莽(왕망)과
대무신왕 27년의 한 光武(광무) 에 관한 기사 등은
후인이 지나사에서 抄錄(초록)한 것이니,
위의 기사 같은 것은
모본왕 이후 곧 삭감된 120년의 연조 중에 移書(이서)한 것이거니와
사실의 진위는 또 別題(별제)로 토론할 것이다.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抄錄(초록): 선별해서 베끼다
移書(이서): 옮겨씀
別題(별제): 다른 제목

(옮기면)
유리왕 31년의 王莽(왕망)과
대무신왕 27년의 한나라 광무 에 관한 기사 등은
후인이 지나사에서 베껴쓴 것이니,
위의 기사 같은 것은
모본왕 이후 곧 삭감된
120년의 연조 중에 있는 것을 옮겨쓴 것이니
사실의 진위는 또 다른 제목으로 토론할 것이다.

관련 기사를 읽어본다.
〔33년(14)〕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병력을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현(縣)은 현도군 에 속하였다.
秋八月, 王命鳥校勘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
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삼국사기 권 제13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琉璃王)]

이어서 읽어본다.

溫祚(온조)의 모 召西奴(소서노)는 朱蒙(주몽)의 제2처요,
주몽은 온조의 繼父(계부)이니,
백제의 건국 연대도 고구려와 대략 같으나
이는 번잡을 피하여 타일에 別論(별론)코자 함.
문무왕이 고구려 嗣子(사자) 安勝(안승)을 詔(조)하여 가로되
“公之太祖鄒车王[공지태조추모왕].
闢地千里年將八百[벽지천리년장팔백]"
이라 한바, '八百[팔백]'의 '八[팔]'은 '九[구]'의 잘못이니,
대개 후인이 개찬한 것인 듯.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北京[북경]에서 申采浩[신채호])

入寇(입구): 쳐들어옴
王莽(왕망): 중국 전한의 정치가(B.C.45~A.D.23).
嗣子(사자): 후계자

(옮기면)
溫祚(온조)의 모 召西奴(소서노)는 주몽(朱蒙)의 두번째 부인이고,
주몽은 온조의 의붓아버지이니,
백제의 건국 연대도 고구려와 대략 같을 것이지만
이는 번잡을 피하여 나중에 별도로 논하려 한다.
문무왕이 고구려 후계자 安勝(안승)을 조서에서 말하길
“공의 나라태조추모왕이
땅을 개척하여 천 리를 만들었고, 해가 800년이 다 되어 간다"
이라 한바, '팔백'의 '팔'은 '九[구]'의 잘못이니,
대략 후인이 고쳐쓴 것인 듯.
(北京[북경]에서 申采浩[신채호])

참고로 선생은 1928년에 시력약화로 실명위기에 빠졌고
같은 해에 5월에 대련감옥에 수감되었다.
1936년에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중요 저작들이 서적출판의 형태가 아닌
원고전달과 신문기사 연재로 진행된 것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한 의문점역시
사료의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일부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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