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9(금)역사단편102-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2)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last month (edited)

이 글은 내용을 보아 1920년대 중반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대어에 친숙한 문구는 그대로 두고
한문이 많이 포함된 구절만 현대어로 옮긴다.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참조

개소문1.jpg
<연개소문>

어제에 이어 읽어본다.

『삼국사기』는 매양 본국이 중화와 관계된 사실을 기록할 때에는
본국사를 버리고 중화사를 좇는 것이 그 서법(書法)인 동시에
연개소문같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사상을 가진 인물의
사적에 대하여는 더욱 그 서법을 남용하였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死年>

본국: 우리나라
중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서법(書法): 글쓰는 태도
사적: 역사기록

계속 읽어본다.

연개소문이 “연 15에 총명신무하므로 무양왕(武陽王)이 이를 징(徵)하여
신(臣)을 삼다”함이 『삼국유사』에 보이고,
“안시성의 전역(戰役)에 연개소문이 양만춘(楊萬春)으로 하여금
당 태종을 쏘아 눈을 맞춤”이 『해상잡록(海上雜錄)』에 보이고,
“고구려가 승군 3만을 발하여 당병 30만을 대파함”이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보였으니,
무릇 『유사』나 『해상잡록』이나 최영전이 모두
연개소문의 전사(戰史)의 서술을 목적한 글들이 아니요,
오직 일시에 모사모어(某事某語)의 관계로 인하여
고기(古記)의 문을 인용한 것에 불과한즉,
『삼국사기』 저작 이전의 고기에
연개소문의 전기적 재료될 기록이 적지 아니하였을지어늘,
『삼국사기』 작자가 그 모든재료를 일필로 도말(塗抹)하고
신ㆍ구 『당서』 『자치통감』을 초록하여
그 소위 ‘개소문전(蓋蘇文傳)’은 송기(宋祁)의 본문이며,
그 소위 ‘보장왕본기(寶藏王本紀)’는 당고종본기에 열간(裂簡)이요,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死年>

총명신무;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남
무양왕(武陽王): 고구려 영류왕<고건무>
징(徵): 부르다, 발탁하다
전역(戰役): 국가간 전쟁
승군: <승려군인>이 아니다. 특수부대인 '조의선인'을 말한다.
처인성전투의 영웅인 '윤휴'도 승군이다.
모사모어(某事某語): 어떤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말
고기: 옛날 기록
도말(塗抹): 덮어서 보이지 않음

송기(宋祁): 구양수와 함께 <신당서>를 편찬한 인물
열간(裂簡): 쪼갠 조각

(옮기면)

연개소문이 “15세에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니 무양왕(영류앙)이
소문을 발탁해서 신하로 삼다." 함이 『삼국유사』에 보이고,
“안시성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양만춘'으로 하여금
당 태종을 쏘아 눈을 맞춤”이 『해상잡록(海上雜錄)』에 보이고,
“고구려가 승군 3만을 동원하여 당병 30만을 대파함”이
『고려사』 <최영전>에 보였으니,
무릇 『삼국유사』나 『해상잡록』이나 최영전이 모두
연개소문의 전쟁사의 서술을 목적한 글들이 아니요,
오직 일시적으로 특정 사건이나 말에 대한 관계로
고기(古記)의 문장을 인용한 것에 불과한즉,
『삼국사기』 저작 이전의 옛 기록에
연개소문의 전기적 재료될 기록이 적지 않았을텐데,
『삼국사기』 작자가 그 모든재료를 일필로 덮어버리고
신ㆍ구 『당서』 와 『자치통감』에서
필요한 문구만 뽑아서 기록했으니,
그 소위 ‘개소문전(蓋蘇文傳)’은 송기(宋祁)가 쓴 글이며,
그 소위 ‘보장왕본기(寶藏王本紀)’는 당고종본기에서
몇줄 가져온 것이다.

단재의 해설이 사실일까?
관련 자료를 살펴본다.

乾封元年,高藏遣其子入朝,陪位於太山之下。
其年,蓋蘇文死,其子男生代爲莫離支.
건봉 원년(666)에, 고장(高藏)은 그의 아들을 조정에 보내어
‘태산’아래에서 자리를 함께하게 하였다.
그 해에 개소문(蓋蘇文)이 죽었고,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를 대신하였다.
<출처: 구당서 권199 上 열전 제149上 동이, 고려>

고장(高藏):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乾封元年(666),藏遣子男福從天子封泰山,
還而蓋蘇文死,子男生代為莫離支.
건봉 원년(666)에, 고장(高藏)은 아들 남복(男福)을 보내
천자가 태산(泰山)에서 봉제를 행하는 것을 따르게 하였다.
돌아오자마자 개소문(蓋蘇文)이 죽었고,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를 대신하였다.
<출처: 신당서 열전145 동이 고려 >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 新唐書云男福., 入唐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25년(666) (보장왕)이 태자 복남(福男)
(『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 한다)을 보내
당에 가서 ‘태산’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25년(666)〕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출처: 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라고 되어있다.
신-구당서의 구절을 가져다가 베꼈는지 여부는 미루고
연개소문이 살아있는데,
보장왕이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서
당나라 왕의 제사에 참석시켰다니 어이가 없다.

김부식의 주석에서,
(『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 한다)주석이 인상적이다.

삼국사기의 어이없는 기록이다.
계속 읽어본다.

『고기』 중에서 인용한 연개소문의 기사는
전 『삼국사기』 중에
오직 “太大對盧蓋金館之[태대대로개금관지]” 8자가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보일 뿐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삼국사기』에 쓰인
“寶藏王二十五年[보장왕이십오년] 蓋蘇文死[개소문사]”가
어떤 본국의 신사(信史)를 의거함이 아니요,
오직 『당서』를 의거하였음이 명백하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死年>

신사(信史): 믿을만한 역사기록

(옮기면)

『고기』 중에서 인용한 연개소문의 기사는
전 『삼국사기』 중에
오직 “태대대로개금관지” 8자가
<김유신전>에 보일 뿐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삼국사기』에 쓰인
“보장왕25년 개소문죽음”기사는
우리나라의 믿을만한 기록에 의한것이 아니라
오직 『당서』를 의거하였음이 명백하다.

단재의 이런 해석에 관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자.

이세민침입.JPG
<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이게 고구려 보장왕본기인가?
당나라 이세민 본기인가?
또 다른 자료도 살펴본다.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舘之, 燕饗有加.
"기입피경, 여왕견태대대로개금관지, 연향유가"

(해석하면)
이윽고 고구려 경내(境內)에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태대대로개금(太大對盧盖金)을 보내
〔춘추 일행의〕 객사(客舍)를 정해주고,
연회를 열어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출처: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金庾信) 상 642년>

김부식일파가 김유신을 신격화하고
반대로 연개소문을 매도하는 것은 알겠지만,
고구려왕이 태대대로 연개소문을 보내
일개 사신인 김춘추의 잠자리를 살펴주게 했다고?

이런식의 역사해석과 기술은
현대의 주류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단재가 <연개소문의 666년 사망설> 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정황증거들이
하나둘씩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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