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7(목)역사단편101-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1)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4 months ago (edited)

이 글은 내용을 보아 1920년대 중반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죽은해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 외에도 단재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는 글이다.

고구려 막리지(莫離支:官名[관명] ─ 원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년(死年)이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5년(666)
당 고종(唐高宗) 건봉(乾封) 원년(檀君[단군] 2999년 ─ 原註[원주])인것은 『삼국사기』나
신ㆍ구『당서』의 기록한 바에 의하여
역래(歷來)의 사가들이 아무 의문 없이 전술(傳述)하여 왔다.

전술(傳述): 기술하여 전하다.

단재는 수상쩍은 기록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학자로서 기본적인 소양이다.
기록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학자로서의 기본이 안된 것이다.
학위의 취득은
정당화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계속 읽어본다.

무릇 인물이란 것은 거의 시세의 제조하는 바라,
연개소문이 송도 말년에 났으면 쭉하여야 최영(崔瑩)이 될 뿐이며,
한양 말년에 났으면 대원군(大院君)이 될 뿐이지만,
다행히 고구려 전성시대,
곧 광개토왕(廣開土王) 이래의 광개(廣開)한 토지와
장수왕(長壽王) 이래 휴양(休養)한 민력과
3백만이상의 수양제(隋煬帝) 해륙군(海陸軍)을 격파한
을지문덕(乙支文德) 이후
백전훈련(百戰訓練)의 군대를 가진 그 시대에 나서,
조선 과거 역사상 미증유의 군국적 침략주의를 행하던 인물이니,
그러면
시세가 연개소문을 낳음이요,
연개소문이 시세를 낳음이 아니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송도말년: 고려말을 의미한다.
쭉하여야: 세게 펼치다.
휴양(休養)한 민력: 휴식을 취한 백성의 힘

여기서 단재의 역사관이 드러난다.
주류역사학자들이 단재를 매장하려고
영웅사관에 빠져 있다고 조작하고 있는데
이 글을 보면 정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역사를 공부한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계속 읽어본다.

톨스토이가 피터대제의 위대함을 흠모하여
그 전기(傳記)를 지으려다가
세세히 사료를 수집한 결과,
도리어 그의 용렬(庸劣)한 점을 많이 발견하고
붓을 던졌다는 말도 있지만,
고대에 이른바 영웅ㆍ위인 들이
거의 시세의 산아요,
그 자체의 위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하 당시 전 중화인의 공파적(恐怕的) 대상이라,
신ㆍ구『당서』가 비록 그 국치(國恥)를 꺼려
당시의 전쟁사를 기록할때에
연개소문의 진공전(進攻戰)의 사실을 빼고
방어전(防禦戰)의 사실만 썼을뿐더러,
그 방어전의 기사 가운데도
오직 안시성(安市城) 일역을
“唐兵攻之不克[당병공지불극]”으로 적은 이외에는
거의 당 태종이 승리한 것으로 적었으나,
그 ‘莫離支[막리지] 益驕傲[익교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일역: 한 곳
唐兵攻之不克: 당나라 군대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莫離支益驕傲’ :막리지가 더욱 교만해지다.

‘莫離支[막리지]不敢出[불감출]’등 구어(句語)의 반면에서
당인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파가
여하하였던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며,
이위공(李衞公) 『병서(兵書)』에
‘莫離支[막리지] 自謂知兵[자위지병]’이라 조소적 구어의 이면에서
연개소문의 전략을 흠탄(欽歎)한 의사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으며,
요양(遼陽)의 개소둔(蓋蘇屯)과
산해관(山海關) 이지(以至) 북경 등지의 종종한 황근대(謊根臺)와
직례(直隷)ㆍ산서(山西) 등성의 각지에 산재한 고려영(高麗營)이
연개소문의 병사가 중화 각지에 출몰하던 유적을 말할 수 있은즉,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공파(恐怕): 두려워하다.
"莫離支 不敢出": 막리지는 감히 나오지 못했다
"莫離支 自謂知兵": 막리지는 자칭 군사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흠탄(欽歎): 공경하고 감탄함.
산해관(山海關) 이지(以至) 북경: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종종한: 가끔 있는
황근대(謊根臺): 謊糧臺(황량대) 또는 謊糧堆(황량퇴)라고 한다.
당태종이 둔덕을 쌓아 식량창고인것 처럼 꾸며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유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개소둔(蓋蘇屯): 연개소문이 진을 친 곳

중국입장에서 볼때,
가장 위대한 왕인 당태종이 패전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연개소문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최악의 원수이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연개소문을
그야말로 인간 말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남기다보니 그 악의적인 평가에 비례해서
연개소문의 업적이 부각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계속 읽어본다.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병이 고구려의 일촌지를 뺏지 못할 것은 명확한 사실이거늘
이제 『삼국사기』가 신ㆍ구『당서』를 의거하여
단군 2999년을 연개소문의 사년으로 단정한다 하면
고구려의 공수동맹국인 백제가 벌써
그 6년 전인 2993년에 멸망하여
연개소문이 능히 구존(救存)치 못하고,
고구려가 복배수적(腹背受敵)의 곤경을 당하여
멸망에 빈(瀕)한 지가 오래니,
만일 그렇다면 당인이 어찌 연개소문을 공파하였으리요.
내가 석년부터 이 의문을 가지고
연개소문의 사년이
백제 멸망 이전(檀君[단군] 2993년 이전 ─ 原註[원주])임을
억단(臆斷)하고 양국 사책의 기록의 실실(失實)임을
공언하나 동조자가 없었다.<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일촌지: 땅 한토막
구존(救存): 구원해서 살아남다.
복배수적(腹背受敵):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
빈(瀕): 가깝다
공파(恐怕): 두려워하다.
석년(昔年): 여러해 전
억단(臆斷):억측(臆測)하여 판단함
실실(失實):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

(옮기면)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나라군이 고구려의 땅한조각도 뺏지 못할 것은 명확한데
이제 『삼국사기』가 신ㆍ구『당서』를 근거로,
단군 2999년(666년)이 연개소문이 죽은해라고 단정한다면
고구려의 공수동맹국인 백제가 벌써
그 6년 전인 2993년(660년)에 멸망했으니
연개소문이 능히 구원해서 살리지 못했기때문에,
고구려가 앞뒤로 적에게 포위되는 곤경을 당하여
멸망에 가까워진것이 오래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당나라사람들이 어찌 연개소문을 두려워했겠는가.
내가 여러 해 전부터 이 의문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가
백제 멸망 이전[단군2993년(660년) 이전 ─ 원주]임을
억측하여 판단하고
양국 사책의 기록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으나 동조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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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666년 까지 살아 있었다면,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까지 멸망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당나라 입장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다.
그랬다면,
그들이 역사기록을 적을때 항상 드러나는
상대방에 대한 오만한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줄로,
"죽었다"라고 되어 있는것은 이미 수상한 것이다.

단재는 중국 사서의 춘추필법에 익숙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사망한 년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선임교수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는 우리의 학문풍토에서
유일하게 노골적이고 예리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역사학의 갈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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