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7(수)역사단편100-고구려이야기5
고구려에 대한 김부식의 평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삼국사기에 당태종의 원정에 대한
평가의 글이 있다.
논하여 말한다.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일을 일으키려 할 때
말리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중략>
사론에서 말하기를,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세우는 것을 즐거워하여
멀리 전쟁을 하도록 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말하기를,
“주필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니
사방 40리(里)여서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군이 고구려에 패하여 거의 떨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시중드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라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마침내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당서』『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이 기사만 보면, 제정신이 조금은 있는듯 하지만
그런 어디까지나,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리한 결과라는
해석을 한 것이다.
왕권을 억제하고 문벌귀족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논리를 펴다보니
마치, 중국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를 논하다<論曰>라는 구절을 보자.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중략)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출처: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고구려 초기의 유명한 재상이었던 을파소 열전의 내용이다.
죽음에 대해 나름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
다음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열전이다.
사망에 대한 내용이 없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출처: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앞에서 당태종을 비판하는 것처럼 논했지만
결국, 고구려 보장왕조에 당태종의 죽음과 유언까지 적어놨다.
연개소문은?
20년간 기록이 모호하다가
갑자기 666년1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기록은 중국의 사서내용을 베낀 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연개소문 사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짧게 정리해 놓은 보고서가 있다.
다음 포스팅에서 살펴본다.
김부식은 경주김씨로 신라지배층의 후예라고 볼 수있다.
철저하게 사대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중국의 사서를 베껴쓰고 있다.
삼국사기의 실제 기사를 읽어보면
김부식을 포함한 편찬자들이
어떤 시각을 가지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전체를 뒤덮고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관련 기사들을 읽다보면,
사대주의에 오염된 역사가들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쳐들어온 당나라 장수가 <정명진>인데,
분발하여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라는식으로 적어놨다.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무성의하게 베끼다보니 이상한 문장이 된 것이다.
위에 나온 구절의 한문 원문은
夏五月, 名振等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湍水逆戰.
名振等奮撃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이 구절을 해석하면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넜다.
우리 군은 그들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湍水)를 건너 맞서 싸웠다.
정명진 등은 분투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들의 외곽과 마을을 불태우고 돌아왔다(歸).
해당기사를 적은 당시의 사관이
어떤 의식과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저렇게 옮겨적었을까?
김부식에서 시작된 이런 이상한 역사관과 세계관은
조선이 망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중국사서 베끼기식의 판타지 역사관을 비판하고
문헌에 대한 합리적인 비교검토를 통해
제대로된 역사학의 시초를 보여준것이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는 상고사(삼국시대까지)를 합리적으로 해석한다.
요즘 말하는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반대로 근거없는 판타지식 추리도 거부한다.
오로지, 기록으로 입증 가능한 영역까지를 추구한다.
가장 합리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김부식류의 매국노적 세계관을 가진 역사학계는
이미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사학을 만들어낸 일본학자들의 제자들과
다시 그 제자들로 확대 재생산 하면서
자신들의 생존틀을 만들어버린 상태다.
따라서, 단재의 주장은 받아 들일수 없는 입장이고,
<민족사학>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거부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비과학적, 비합리적 역사해석이
정상적인 역사학이라고 정당화 하고 있다.
그것이 교과서이고,
우리가 배운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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