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1(목)역사단편94-평양패수고(25) 한사군4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
본문과 주석은 <독립기념관 제공>
신채호선생은,
‘낙랑(樂浪)과 평양(平壤)’은 ‘펴라’의 이두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제 평양패수고의 결론 부분으로 들어간다.
戊(무)
結論 以上에 말한바 같이,
中古時代의 平壤 浿水는 南北에 分峙(분치)하여
南에 있는 者는 樂浪國(낙랑국)이라 平壤城(평양성)이라 稱(칭)하여
그 位置(위치)가 大同江 上에 固定(고정)하고,
北에 있는 者는 樂浪郡(낙랑군)이라 稱하여
그 郡治(군치)가 遼東부터 遼西(요서)
遼西(요서)부터 上谷(상곡)까지 移動(이동)한 者이다.
<출처: 평양패수고>
分峙(분치): 나누어 세우다
中古時代(중고시대): 기원전후 삼국시대를 말하는듯 하다
(해석하면)
戊(무). 결론
위에서 말한바 같이,
中古時代의 <평양-패수>는 남북에 별개로 세워져서
남쪽에 있는 것는 <낙랑국>이라 <평양성>이라 稱(칭)하여
그 위치가 대동강 언저리에 고정되어 있고,,
북쪽에 있는 것는 <낙랑군>이라 칭하여
그 군(郡)을 다스리는 장소가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上谷(상곡)까지 이동한 者이다.
그러나 南樂浪(남낙랑)에는 中國人의 勢力이
中古時代에 아주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 斷言(단언)할 수 없는 者이다.
대개 中古時代에 朝鮮人은
今 朝鮮 八道 以外에 鴨綠江(압록강)을 渡(도)하여
興京 以東(흥경이동), 開原 以北(개원이북)의
奉天·吉林(봉천-길림)의 大部分을 根據(근거)하고,
<출처: 평양패수고>
(해석하면)
그러나 남낙랑[=평양]에는 중고시대에
중국인의 세력이 아예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중고시대에 조선인은
현 조선팔도이외에 압록강을 건너서
興京(흥경) 동쪽, 개원(開原)북쪽의
봉천·길림지역의 대부분을 근거로 삼고,
<출처: 평양패수고>
今 長城 以北으로 出하여
熱河道(열하도)·興和道(흥화도)·綏遠道(수원도) 等으로
進取(진취)의 地方을 삼고,
勢(세)가 盛(성)할 때는 南下하여
漁陽어양(北京 附近북경부근)·
右北平우북평(永平府영평부)·
太原태원(大同府대동부) 等을 攻擊(공격)하고,
中國人은 永平府(영평부)부터 山海關(산해관)으로
進取(진취)의 地方을 삼아
勢가 盛하면 遼東부터 或 興京 以東(혹 흥경 이동)도 窺伺(규사)하며
或 薩水(살수) 以南까지도 侵逼(침핍)하였거늘,
<출처: 평양패수고>
窺伺(규사): 기회를 엿봄
侵逼(침핍); 쳐들어와서 핍박함
綏遠道(수원도):중화민국초기행정구역명。 1914/7월에 설치,(현 내몽고호화호특시)
(해석하면)
현재의 장성 북쪽으로 진출하여
熱河道(열하도)·興和道(흥화도)·綏遠道(수원도) 등으로
진출하는 지방으로 만들고,
세력이 왕성할 때는 남하해서
어양[漁陽:북경부근)·
우북평(右北平:영평부)·
태원(太原: 大同府대동부) 등을 공격하고,
중국인은 영평부(永平府)부터 산해관(山海關)으로
진출하는 지방으로 삼아
세력이 왕성할 때는
요동(遼東)부터 혹 흥경(興京) 동쪽까지 노렸으며
어쩔때는 살수(薩水) 남쪽까지도 쳐들어와 핍박하였거늘,
歷代의 史氏들이 매양 이런 것을 認明(인명)하지 못함으로
『三國史記』를 읽을 때
高句麗가 「遼西(요서)에 築城(축성)하였다」,
「漁陽上谷右北平(어양상곡우북평 等에 侵入(침입)하였다」
는 말을 보면,
<출처: 평양패수고>
認明(인명): 깨달아서 밝힘
(해석하면)
지금가지의 역사학자들이 이런것을 깨닫고 밝히지 못해서
삼국사기를 읽을때
<고구려가 요서에 성을 쌓았다>
<어양-상곡-우북평등에 침입하였다>라는 문구를 보면,
高句麗(고구려)가
熱河道(열하도)·興和道(흥화도) 等地부터 南向하여
永平府(영평부) 或 大同府 等(대동부 등)을 攻(공)한 것인 줄을 모르고
山海關(산해관)부터 西進서진)하여,
永平府 或 大同府 等(영평부 혹 대동부등) 을 攻(공)함인 줄로 알며,
<출처: 평양패수고>
(해석하면)
고구려가
열하도-흥화도 등지부터 남쪽으로 향해
영평부 혹은 대동부 등을 공격한 것 인줄 모르고
산해관부터 서쪽으로 진격해서
영평부 혹은 대동부 등을 공격한 것 이라고 생각하며
지도를 통해 살펴본다.
(1)은 근거지인 개원
(2)는 산해관: 이건 고려시대 까지 없었다.
(3)은 어양(漁陽)
(4)는상곡(上谷)
(5)는 대동부(大同府)
(6)은 산서성 태원
우북평(右北平)은 현 하북성에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가 불분명하다.
신기하게도 우리 고대사와 맞물리는 지명들의 위치는
안개속에 감춰져 있다.
조선시대까지의 역사학자들이 생각했던 대륙공략루트는
지도의 아래쪽이고,
단재가 해석한 루트는 지도 위쪽의 형광색이다.
즉 남하를 한것이지, 서진을 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아래쪽 루트는 지형이 공격하기에 불편하다.
위쪽 루트는 몽고, 거란, 금, 청나라가
중국땅에 있던 나라들을 공격하던
공식적인 루트였다.
산해관은 명나라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착각하면 안된다.
계속 읽어본다.
中國人의 勢力(세력)이
美川王 以前 累百年(미천왕 이전 누백년) 동안
平安·黃海 等地(평안, 황해 등지)에 蟠據(반거)하였던 줄로 아니,
이 따위는 다 非常한 錯誤(착오)라.
設或(설혹) 平安·黃海에 一·二次 中國人의 兵禍(병화)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또한 麗末 紅巾(려말 홍건)이 開城에 侵入(침입)하듯이
暫時(잠시)의 侵擾(침요)가 될 뿐이니,
永久(영구)한 占領地(점령지)로 있었다함은
史的 記錄에 틀리는 妄說(망설)이라 할 것이요.
<출처: 평양패수고>
蟠據(반거): 터를잡고 지킴
兵禍(병화): 전쟁으로인한 피해
紅巾(홍건): 홍건적
侵擾(침요): 침범해서 소란케 함
(해석하면)
미천왕 이전 수 백년동안
평안, 황해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았던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따위는 다 대단한 錯誤(착오)라.
설령 평안·황해도에
한 두차례 중국인의 전쟁피해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고려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했듯이
잠시(暫時)의 침입과 소란일 뿐이니,
영구(永久)한 점령지로 있었다함은
역사 기록에 맞지않는 망령된 설명이라 할 것이요.
물론, 고구려와 백제의 대륙공략 루트는
고구려가 단재가 해석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때의 이야기다.
중국측의 사서를 검토해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이 단재의 해석과 달라진다.
신채호 선생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밝히는데 필요한
사료와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격루트도 달라지게 될탠데
그 경우에도
서진이 아니라
남하라는 것은 분명한거 같다.
그건 나중에 살펴본다.
Thank you, friend!
I'm @steem.history, who is steem witness.
Thank you for witnessvoting for me.
please click it!
(Go to https://steemit.com/~witnesses and type fbslo at the bottom of the page)
The weight is reduced because of the lack of Voting Power. If you vote for me as a witness, you can get my little v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