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09(화)역사단편92-평양패수고(23) 한사군2

대륙.JPG

고대사 관련 기록을 읽을때는
이 지역을 머리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조선의 영토를 기준으로 고대사를 생각하면
역사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다.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
본문과 주석은 <독립기념관 제공>

지난 포스팅의 결론부분은 아래와 같다.

후한서』 제기 광무제 23년에
「고구려(句麗)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인 대승(戴升)이
<낙랑>에 와서 소속되었다.」이라 하니,
蠶支(잠지)는 곧 蠶台(잠대)요,
蠶台(잠대)는 樂浪에 속한 현의 이름이거늘,
이제 잠대가 낙랑에 속함을 요청한다는 것은
마치 ‘양주’가 경기도에 속하려 한다는 웃기는 이야기다.

경기도에 속해있는 양주의 수령이 찾아와서
경기도에 속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자료를 비교검토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모순된 내용들이 남게 되었고
그걸 꼼꼼하게 살피면
진실을 찾게 되는 것이다.

평양패수고를 계속 읽어본다.

和帝 元初 五年(화제 원초5년)에
「宮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궁복여예맥구현도공화려성」이라 하니,
華麗(화려)는 樂浪 東部인 嶺東 七縣(영동7현)의 一인즉
光武(광무) 때 벌써 罷棄(파기)한 縣(현)이거늘,
이제 다시
高句麗의 侵入(침입)하는 漢의 縣(현)이 됨도 不成說(불성설)일 뿐더러,
<출처: 평양패수고>

和帝(화제): 한나라의 제19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4대 황제
원초(元初: 114~120)이므로 원초5년은 118년

宮(궁):국조왕, 태조대왕, 고구려 제6대 왕(재위: 53∼146년)
復(부): 다시
光武(광무) : 후한 광무제
不成說(불성설): 말이 되지 않음

영동7현: 東暆縣(동의현)・不耐縣(불이현)・蠶臺縣(잠대)・
華麗縣(화려현)・耶頭味縣(사두매현)・前莫縣(전모현)・
夫租縣(부조현)

(해석하면)
화제(和帝) 원초5년(118)에
"궁(宮)이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이라 하니
華麗(화려)는낙랑 동부인 <영동7현>의 하나인즉
광무 때 벌써 罷棄(파기)한<주석1> 현이거늘,
이제 다시 고구려가 침입하는 漢의 縣(현)이 된다는것도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주석1>
『후한서』에는
"다시 영동(嶺東)의 일곱 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건무(建武) 6년(30년)에 도위관(都尉官)을 폐지하고
마침내 영동 지역을 버렸다."라고 되어있다.
영동7현을 버렸다는 기록이다.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 25~57사용

玄菟(현토)에 寇(구)하여 華麗(화려)를 攻한다 함은
「樂浪의 屬縣(속현)이 곧 玄菟(현토)의 屬縣(속현)이라」는
矛盾(모순)의 語이며,

寇(구):침범하다, 약탈하다, 도적
華麗(화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에 속한 현이다.

(해석하면)
현토에 침입하여 화려를 공격한다 함은
<낙랑의 속현이 곧 현토의 속현>이라는 모순되는 말이며

高句麗의 國名에 擬(의)하여 高句麗縣(고구려현)을 둠은
아직 容恕(용서)하고라도
琉璃王(유리왕) 三十三年에 <주1>
太子 無恤(무휼)이 高句麗縣(고구려현)을 占領(점령)하여
그 땅이 高句麗國(고구려국)의 所有가 되었거늘,
이 뒤 三百年을 지나도록
高句麗縣(고구려현)이 玄菟(현토)의 首府(수부)로
『漢書』 地理志나 『後漢書』 郡國志(후한서 군국지)에 적힘은
架空(가공)의 妄筆(망필)이다. <출처: 평양패수고>

擬(의): 모방하다
琉璃王(유리왕):BC19~AD19재위< 출처:다음>
首府(수부): 수도, 중심
架空(가공): 거짓으로 꾸며냄
妄筆(망필): 속이는 글, 망령된 글
<한서-진서 지리지>는 당태종때인 7세기의 작품이다.

(해석하면)
고구려의 국명을 모방해서 ‘고구려현’을 둔 것은
당대에는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유리왕 33년에<주2>
태자 무휼이 <고구려현>을 점령하여
그 땅이 고구려국의 소유가 되었거늘,
그 뒤 3백년이 지나도록
고구려현이 현토군의 도읍이라고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에 적힌것은
거짓으로 꾸며낸 망령된 글이다.

<주2> 삼국사기에는
秋八月, 王命鳥校勘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출처:삼국사기 권 제13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琉璃王)>
33년(14),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병력을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현은 현도교감군에 속했다.

서기 14년에 고구려가 차지했고,
광무제6년(30)에 영동지역을 포기했다고 기록해놓고
화제(和帝) 원초5년(118)에 고구려가 영동7현의 하나인
화려현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 이후엔 자기들이 다시 차지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자기땅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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