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08(월)역사단편91-평양패수고(22) 한사군2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6 days ago (edited)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
본문과 주석은 <독립기념관 제공>

어제 올렸던 포스팅에 관련된 유튜브영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댓글을 달았더니
누군가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흥분하는 것을 봤다.
아마도, 국사교과서 편에 서있는 사람같은데
이해당사자가 아니라면 그리 흥분할것 까지야 있을런지..

오늘의 내용도 결국 한사군과 연결된다.
명백한거 같았던 한사군
기록을 보면 의문투성이.

한서지리지 해당 구절을 직접 들여다봤다.

玄菟郡[현토군]
戶(호)四萬五千六(45,006),
口(구) 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221,845)

선생이 인용한대로,

현토는 3개현에 221,845명이다.

비슷한 가구수와 인원을 가진 다른 현과 비교해본다.

遼東郡[요동군]
戶55,972,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272,539)。
縣(현)18개

漁陽郡[어양군]
戶六萬八千八百二(68,802),
口二十六萬四千一百一十六(264,116)
縣(현)十二(12개)

이상하지 않은가?
이걸 자연스럽다고 넘어가면 그게 이상한거다.

한사군비교.JPG

중국사서에 나타난 소위 <한사군>이 모순되는 내용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간다.

낙랑에 속한 현들 중에
儼邯(엄한) 또는 𧦦邯(염한)이 있다.
한서지리지에는 儼邯(엄한)으로 되어있고
군국지에는 𧦦邯(염한)으로 되어 있다.
판본에 따라 다른거 같고,
독립기념관이 제공하는 본문에서
주석을 달지 않은것을 보면
큰 이슈는 없는듯 하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중국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핑계'를 세가지를 아래와 같이 나열했다.

“한나라의 소제(昭帝)가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폐지하고
낙랑(樂浪)과 현도(玄菟)로 합병하였다.”註25)가
그 제1의 답안일 것이며,

“현도군(玄菟郡)이 다시 고구려(句麗)로 옮겨졌고,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군(樂浪郡)에 속하게 되었다.” 가
그 제2의 답안일 것이며,

마지막은

“다시 嶺령 동쪽에 7개 현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광무(光武) 6년에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결국 령 동쪽 지역을 버렸다.”주26)가
그 제3의 답안일 것이며,

이다.
세번째 답안에

광무(光武)6년에

라는 구절이 있고 주석26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시 영동(嶺東)의 일곱 현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건무(建武) 6년(기원후 30년)에 도위관(都尉官)을 폐지하고
마침내 영동 지역을 버렸다."

라고 되어있고

건무(建武) 6년(기원후 30년)

라고 되어있다.

단재는 <광무6년>라고 했고
독립기념관 자료는 <건무6년>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단재가 틀렸다는 지적이다.
그럼 진실은 무엇인가?

건무1.JPG

光武建武六年(광무건무6년)이라고 되어있다.

독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후한 광무제의 연호인 건무를 동시에 알려줬다.

광무제의 건무6년(光武建武六年)이 된다.

이렇게 분명하게 되어 있는것을
왜 독립기념관의 자료입력 담당자는

建武(건무)를 빼고
光武(광무)만 적어놓고는
교정하는 내용의 주석을 달았을까?

한숨이 나온다.

지난 글에 이어서 읽어본다.

「建女中公孫康分屯有건녀중공손강분둔유
以南荒地爲帶方郡이남황지위대방군」이
그 第四의 答案(답안)일 것이나,
<출처: 평양패수고>

건안중.JPG

‘建女’는 책에는 ‘建安(안)’으로 되어있다.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일까?
의도적인 오류가 아니라면 문제될건 없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 어리둥절하게 된다.

이걸 또 억지로 말을 만들려면,
어떤 황당한 해설이 나올까?
‘建女(건녀)’라는 새로운 연호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公孫康(공손강): 후한말 요동태수, ‘공손도’의 아들
建安(건안): 후한 헌제의 연호(196~220)
建安中(건안중)은 ‘건안 연중’의 줄임말이다.
屯有(둔유): <낙랑군> 소속의 현(縣)
‘建女中公孫康分屯有건녀중공손강분둔유’는
<建安中公孫康分屯有건안중공손강분둔유>로 고치고

(해석하면)
建安(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屯有)>를 나누어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
그 제4의 답안일 것이나,

그러나 『後漢書후한서』 帝紀 光武帝 二十三年(제기 광무제23년)에
「句麗蠶支落大加戴升 (구려잠지락대가대승)
詣樂浪內屬 (예낙랑내속)」註27)이라 하니,
蠶支(잠지)는 곧 蠶台(잠대)요
蠶台는 樂浪의 縣名(현명)이거늘,
이제 蠶台(잠대)가 樂浪(낙랑)에 屬(속)함을 求하다 함은
마치 楊州(양주)가 京畿道(경기도)에 屬(속)하려 한다는 笑話(소화)이며,
<출처: 평양패수고>

낙랑25.JPG
<낙랑25현: 한서 지리지>에 잠대가 속해있다.

詣(예) : 출두하다
笑話(소화): 웃기는 이야기

(해석하면)
그러나 『후한서』 제기 광무제 23년에
「고구려(句麗)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인 대승(戴升)이
<낙랑>에 와서 소속되었다.」註27)이라 하니,
蠶支(잠지)는 곧 蠶台(잠대)요 蠶台는 樂浪에 속한 현의 이름이거늘,
이제 잠대가 낙랑에 속함을 요청한다는 것은
마치 ‘양주’가 경기도에 속하려 한다는 웃기는 이야기이며,

독립기념관의 주석이 달려있다.
註27)『後漢書후한서』에는
“建武二十三年冬 (건무23년동)
句麗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 (구려잠지락대가재승등만여구)
詣樂浪內屬(예낙랑내속)”으로 되어 있다.

(주석을 해석하면)
건무(建武) 23년(기원후 47년) 겨울,
고구려(句麗)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인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樂浪)에 와서 내속(內屬)하였다."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의 첫번째 연호다.
따라서 광무제23년과 건무23년은 동일하다.
'萬餘口(1만명)'이 추가 되었다.

다음글로 이어진다.

Sort:  

Thank you, friend!
I'm @steem.history, who is steem witness.
Thank you for witnessvoting for me.
image.png
please click it!
image.png
(Go to https://steemit.com/~witnesses and type fbslo at the bottom of the page)

The weight is reduced because of the lack of Voting Power. If you vote for me as a witness, you can get my little vote.

한글이 빨리 발명되었어냐야하는데 너무 어렵네요.

중국측의 기록이 대부분이니 어쩔 수 없는거 같습니다. 조선에서도 한글은 양반들이 무시하고 한문만 떠받들었으니까요.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4
JST 0.030
BTC 59715.05
ETH 3186.24
USDT 1.00
SBD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