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03(수)역사단편86-평양패수고(18) 백제와 낙랑6

in Avle 종교 철학 인문학2 months ago (edited)

古陀炤娘(고타소랑)의 慘死(참사)로 因한
新羅人의 激怨(격원)이 百濟歷史(백제역사)에 미쳐,
매양 그 攻烈(공열)은 刪(삭)하고 敗亡(패망)만 記함으로
遼東·遼西 兩 樂浪의 初頭關係(초두관계)가 本紀에 闕(궐)함이니,
그러면 新羅·高句麗(신라-고구려)의 兩 本紀에 뿐 아니라
곧 百濟本記(백제본기)에도
樂浪國 滅亡 以後(낙랑국 멸망이후)의 南 「펴라」는 平壤이라 쓰고,
北 「펴라」는 樂浪이라 쓴 鐵證(철증)이며,
이로 말미암아 唐 太宗(당 태종)이 晋書(진서)를 지을 때
高句麗와 百濟의 戰蹟(전적)과 疆土(강토)를 많이 刪去(산거)함이 明白하다.
<출처: 평양패수고>

古陀炤娘(고타소랑): 김춘추의 딸, 대야성전투에서 죽임을 당했다.
당시 대야성의 성주였던 춘추의 사위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상태였다.
激怨(격원): 깊은 원한
攻烈(공열): 강하고 빛이남
刪(삭): 삭제함, 지움
初頭關係(초두관계): 시작과 전성기
闕(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빠뜨리다.
鐵證(철증): 확고한 증거
戰蹟(전적): 싸운 자취
刪去(산거): 골라서 내버리다

(해석하면)

고타소랑의 ‘참사’로 인한
신라인의 깊은 원한이 백제역사에 미쳐,
매양 그 ‘강하고 빛나는 업적’은 삭제하고 ‘패망’만 기록함으로
요동-요서 양 낙랑의 시작과 전성기 기록을 본기에 빠뜨렸으니,
그러면 신라·고구려의 양 본기에 뿐 아니라
곧 백제본기에도
낙랑국 멸망 이후의 남「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북쪽 「펴라」는 낙랑이라 쓴 확고한 증거이며,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 태종이 晋書(진서)를 지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자취와 영토를 많이 골라서 삭제한것이 명백하다.
<출처: 평양패수고>

晋書(진서): ‘당 태종’때 편찬한 역사서.
연대:서진(265년 ~ 316년)과 동진(317년 ~ 418년)시기
당태종은 고구려에 침략했다가(645) 안시성에서 화살을 맞아
649년에 죽었다. 진서가 완성된것은 648년.
지나인들의 행태를 볼때 원정에 실패하고,
화살을 맞아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었으니
고구려등의 역사를 얼마나 심하게 조작을 했을지
쉽게 추측이 된다.

최근의 중공이 우리에게 보이는 행태를 보면
쉽게 추측이 된다. <김치, 한복, 등등>

계속 읽어보자.

資治通鑑(자치통감)에 胡三省(호삼성)이
慕容廆(모용외)의 樂浪을 柳城(유성)에 僑治(교치)한 者라 하고,
文獻通考(문헌통고)에 百濟의 遼西 晋平(요서-진평)을
唐 柳城·北平之間(당, 유성-북평지간)이라 하고
『唐書』 地理志(당서 지리지)에
柳城(유성)은 東至遼河四百八十里(동지요하480리)
南至海二百六十里(남지해260리)
西至北平郡七百里 (서지북평군700리)
北至契丹界五十里(북지거란계50리)라 하고,
<출처: 평양패수고>

胡三省(호삼성:1230~1302): 남송말 원나라 초기의 역사학자
慕容廆(모용외:269~333):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
僑治(교치): 임시(더부살이)로 설치하다.
중국의 사서를 보면 지명을 교치하는 경우가 많다.
외부의 공격을 받아 영토를 상실한 경우,
그 곳에 있던 지명을 내부로 옮겨서
마치 그곳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것 처럼 기록한다.
한족의 세력이 약했던 시기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춘추필법과 함께 지나인들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이다.

文獻通考(문헌통고): 원나라때 마단림(1254?~1323)이 편찬한 정치서
연대: 고대~남송 영종(1224)

『唐書』 地理志(구당서 지리지): 후진 945년에 완성
연대:수 문제(581)~ 당 애종(907)
신당서를 쓰기전 당나라의 권위를 높이기위해 각색된 것으로 평가된다.

(해석하면)
자치통감에 胡三省(호삼성)이 이르길,
慕容廆(모용외)의 낙랑은
柳城(유성)에 더부살이로 설치한 곳이라 하고,
文獻通考(문헌통고)에서
“ 백제의 <요서-진평>은
당나라, 유성과 북평사이에 있다.”라 하고,
(구)당서 지리지에
柳城(유성)은
동쪽으로 요하까지 4백80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백60리
서쪽으로 북평군이 700리
북쪽으로 거란경계가 50리라 하고,
<출처: 평양패수고>

이어서 읽어보자.

北平(북평)은
東至柳城七百里(동지유성700리)
西至漁陽三百里(서지어양300리)
東北到柳城七百里(동북지유성700리)라 하니,
이로써 柳城·樂浪(유성-낙랑)의 位置(위치)를 想像(상상)할만하다.
<출처: 평양패수고>

(해석하면)

북평(北平)은 동쪽으로 유성에 이르기까지 7백리,
서쪽으로 어양에 이르기까지 3백리,
동북쪽으로 유성에 이르기까지 7백리라 하니, ,
이로써 <유성낙랑>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낙랑'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을때,
우리는 그것이 항상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바로 '僑治(교치)' 때문이다.

한나라 무제시기의 낙랑과
모용외의 낙랑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 호삼성의 해석대로라면,
백제 분서왕이 공격했다고 나오는
모용외의 낙랑은
대동강의 '낙랑국'이나
지금의 만주에 있었다는 한무제의 낙랑이 아니라
다음 지도에서 보게될 황하유역의 '유성'이 된다.

단재가 인용한 사료에 따르면,
<북평, 유성, 어양>의 위치를 확인하면
낙랑의 위치도 쉽게 확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대청광여도를 살펴보자.

73.jpg

우측아래 유성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에 ‘어양’이 표시되어 있고,
왼쪽에 붉은색박스부분은 북경이다.
북평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기록으로는 쉬울거 같았지만,
특정한 지명 두 곳이 엉뚱한곳에 표시되고나니
엉망이 되어 버렸다.
지도를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상고시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들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땅을 가르키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시대 이래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의사역사학자와
신채호 선생이후 소수의 학자들간에
돌이킬 수 없는 벽이 가로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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