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02(화)역사단편85-평양패수고(17) 백제와 낙랑5

단어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본문은 <독립기념관 제공>

지난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245년에 낙랑과 대방의 '태수'를 시켜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삼국지>기록이 있다.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국'은
태수가 아닌 왕이 다스렸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무신왕20년(37)에 멸망했다.

당연히, 245년의 낙랑은 '낙랑군'이며
평양에 있던 '낙랑(국)'이 아니다.

다음 내용을 읽어보자.

그런 즉
劉昕(유흔)·劉茂(유무)·弓遵(궁준) 等이 據(거)한
樂浪, 帶方이 遼東(요동)의 樂浪, 帶方인 同時에
古爾王(고이왕)의 侵襲(침습)한 樂浪도 遼東(요동)의 樂浪이니,
이는 대개 百濟의 海外 發展의 始(시)일 것이며

汾西王(분서왕)의 侵襲(침습)한 樂浪으로 말하면
兩書 百濟傳(양서 백제전)에
「晋世百濟據有遼西(진세백제거유요서)」註24라 하니,
汾西 元年(분서원년)은 晋 惠帝 元康 八年(진 혜제 원강 8년)이요
慕容廆(모용외)와 同時라.
<출처: 독립기념관 평양패수고>

兩書 百濟傳(양서 백제전)에서 '兩書(양서)'는
단재가 『粱書양서』를 잘못 쓴 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출판본을 확인하면,

양서.JPG
라고 『粱양』으로 되어있다.

국사편찬위 혹은 독립기념관 자료입력 담당자가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질렀다.
어려운 글자도 아닌것을...

『粱書양서』: 당나라 태종때 역사책
내용: 남북조의 양나라(502 ~ 557), 양무제 원년 ~ 양경제 3년

서진( 265~316): 위문제(=조예) 가 239년에 죽고,
사마중달이 실권을 잡는다(249)
나중에 , 중달의 후손 사마염이 조조의 후손들을 죽이고
왕위를 이양받아 세웠다.
惠帝(혜제): 서진의 2대황제, 본명 사마충
元康(원강8년):299년

(해석하면)
유흔·유무·궁준 등이 차지하고 있던 낙랑, 대방이
遼東(요동)에 있던 낙랑, 대방인 동시에
고이왕의 침범한 ‘낙랑’도 遼東(요동)의 낙랑이니,
이는 대개 백제의 ‘해외 발전’의 시작일 것이며
‘분서왕’이 침략한 낙랑으로 말하면
『粱書양서』 <백제전>에
「진나라때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註24라 하니,
<분서원년>은<진 혜제 원강 8년(299)>이요
慕容廆(모용외)와 같은 시대다.
<출처: 평양패수고>

註24)『粱書양서』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기국본여구려재요동지동)
晋世 句驪 旣 略有遼東(진세구려기략유요동)
百濟 亦 據有(백제역거유)
遼西晋平二郡之矣(요서진평2군지이)”로 되어 있다.

句麗(구려)의 '려'를 다르게 기록했다.
麗(려): 아름다울 려,중국어[리: lí ]
驪(려): 검은 말,[리: lí ]

주24해석)
<양서>에는
그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지역을 차지했다,
백제또한 요서와 진평 두 개군을 차지했다,

史에 據(거)하면 慕容廆(모용외)의 遼西 樂浪의 建置(건치)는
美川 十四年 張統(미천14년 장통)의 降(강)을 받은 때의 일이나

그 前에 慕容遵(모용준)이 樂浪王의 號(호)를 가짐을 보면
遼西 樂浪(요서낙랑)의 建置(건치)가 已久(이구)함을 볼지니,
그러면 대개 百濟가 慕容氏(모용씨)의 遼西(요서)를 攻奪(공탈)하고
彼(피)의 樂浪 東縣(낙랑 동현)을 차지함에,
樂浪太守(낙랑태수)가 兵力으로 百濟를 막기에 不足함으로
드디어 刺客(자객)을 보내 王을 暗殺(암살)함이니,
이것도 百濟의 海外 發展의 一斑(일반)이라.
<출처: 평양패수고>

建置(건치): 설치하다
已久(이구): 이미 오래되었다
攻奪(공탈): 공격하여 빼앗음
一斑(일반): 한 부분

(해석하면)

사서에 따르면 慕容廆(모용외)가 요서 낙랑을 설치한 것은
미천왕14년에 장통의 항복을 받은 때의 일이나
그 전에 慕容遵(모용준)이 낙랑왕의 칭호를 가짐을 보면
요서낙랑의 설치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개 백제가 慕容氏(모용씨)의 ‘요서’를 공격해서 빼았고
저들의 낙랑 동쪽현을 차지함에,
낙랑태수가 병력으로 백제를 막기에 부족하므로
드디어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함이니,
이것도 백제의 해외발전의 한 부분이라.

해당 기사에 나오는 백제 '분서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본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분서왕(汾西王)7년(304)註 001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註 002

국사편찬위의 주석이 달려있다.
주002)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과 한강 유역의 백제 사이에는
지금의 황해도지역에 대방군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낙랑군의 군현을 직접 빼앗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주류사학의 입장에서는

낙랑이 평양에 있어야 하니 설명이 안된다.

분서왕의 사망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7년(304)〕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여기에는 아무런 주석도 없다.
언급할수록 문제가 커지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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