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27 보편적 가치로서 ‘자유’와 ‘민주주의’, 금융자본의 자유를 위한 외피>

최근 수십년간 한국사회는 보편적 가치로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했다. 그런 점은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내세웠던 이념이기도 했다. 소위 보편적 이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절대적 가치’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피를 흘리면서 쟁취했던 보편적 가치가 ‘절대적 가치’는 아니다.

미국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는 자신들의 세계 지배를 위한 하나의 이념적 수단이다. 마치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가치들은 세계 지배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소련이 붕괴하고 그 누구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이 주장해온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있다.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이는데 첫번째 미국이 편의에 따라 자유의 개념을 바꾸고 있으며, 두번째 미국에 대항하는 두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다른 정치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국 대 중러의 세력다툼이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와 개념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자유의 개념을 작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했던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원래 자유란 경제적 자유를 의미한다.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의 부수적 효과 정도로 보는 것이 옳으며 오히려 정치적 자유는 민주주의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 자유를 보장했던 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는 자코뱅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자코뱅 민주주의는 경제적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경제적인 자유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현재 인류의 역사적인 전취물로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도 반동적 물결로 그 의미를 퇴색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되려면 그에 대한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 자유가 특히 그러하다. 아무 수식이 없는 자유란 무의미하며 선과 악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식어로 한정되지 않는 자유는 보편적인 이념이나 가치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기본적으로 헌법에 기술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 즉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외피의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유라고 할때는 정치적 자유보다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경제적 자유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경제적 자유는 매우 광범위하다. 미국이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를 추진해왔던 것도 바로 경제적 자유의 확대과정이었다.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가 무슨 의미인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는 자유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이 패권을 확보하고 있을 당시의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장사하고 영업할 수 있는 자유를 말했다. 영국은 그런 자유를 주장하면 중국에 아편을 팔았다. 중국을 아편에 파는 것도 자유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에서 신자유란 금융자본이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영업을 하는 자유를 말했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확대과정에서 긍융자본의 활동영역을 넓히기 위해 자유를 주장했던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민주주의를 탄압했던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다. 남미 국가들은 군부구데타로 민주주의가 짓밟혔다. 그랬던 것은 남미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통해 수립한 국가가 미국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과 이익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말은 형용모순인 측면이 없지 않다. 정치적 자유는 이미 민주주의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굳이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서 자유라는 말을 민주주의앞에 붙일 이유는 없다. 자유는 경제적 영업의 자유, 즉 방해받지 않고 경제활동을 할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이 보편적 가치로 주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미국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논리에 의해 재편된다. 아마도 이번 미중패권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가 약화되거나 무너지면 미국이 주장했던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세계는 중국식의 정치질서 혹은 러시아식의 정치질서가 지배적인 힘을 발휘할 지도 모른다.

최근의 미국과 중러의 대결은 미국 금융자본의 확대와 자유의 향유가 한계에 봉착했고 그리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세계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들은 금융자본의 침투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지의 충돌이 미중패권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일국의 자본이 강력하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권위주의적 체제가 우세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그 국가는 곧장 미국 금융자본의 먹이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정치적 자유를 지지한다. 그것은 인류가 역사를 통해 얻은 전취물이다. 동양지역에서 정치적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과 중국이 아닌가 한다. 한국은 해방이후 수차례의 혁명으로 피를 흘리면서 정치적 자유를 얻어냈다. 중국은 신해혁명이후 외세와 전제정치를 물리치면서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물론 중국의 정치적 자유가 우리와는 상당한 내용적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혁명적 투쟁을 통해 인민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윤석열이 자유를 주장했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정치적 자유를 의미한다고 항변할 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자본의 자유, 방해받지 않는 영업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말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자유는 인민들이 피를 흘리면서 얻어냈다. 그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방해했을 뿐이다. 경제적 자유는 일정정도의 수준이 넘어가게 되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황폐하게 만든다. 실제 한국인 하위 50%가 전체 부의 5%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무한정한 경제적 자유의 결과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이 난무하는데 과연 우리가 얼마나 생각을 하고 사용을 하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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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책 내실 거죠?
그냥 두기엔 너무나 글이 유려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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