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생의 이면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얘기들이 있다. 당사자는 그 이야기들을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성급하게 꺼내어 놓는다. 상대의 의사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비참한 가정사는 무기로 치환된다. 많은 경우 스스로를 할퀴는 예리한 칼날이 되고, 단단하게 나와 타인을 구분짓는 갑옷이 되고. 관계에서 우위를 점령하는 카드가 되고, 글을 씀에 있어서 자양이 되기도 한다. 갓난쟁이 때 부모가 이혼을 했다던 한 친구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엄마를 찾아나선 기구한 사연은 뭇 여자아이들의 모성애를 자극하고 그에 대한 연민을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들었다. 뒤늦게 그 이야기가 비밀이 아닌 모두가 아는 공공재인걸 알고는 모종의 배신감을 느끼던 아이도 더러 있었다. 생의 이면을 보는 내내 듣고 싶지 않은 비밀을 엿보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화자는 소설가 박부길의 살아온 삶의 이력과 그의 소설들과 관련지어 추적해보라는 편집자의 주문으로 그의 전 일생을 탐구한다.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생은 그의 소설과 오버랩되어 펼쳐지며 어느 순간 누가 화자이고, 누가 박부길긴지 나는 이따금 길을 잃곤 했다.
어떤 일의 시작에는 책임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뻥 뚫린 동굴과 같은 캄캄한 영역이 있다.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있는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또는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운명적인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는 식이다. 운명적이라고 발음하는 순간처럼 운명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운명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생의 이면 152p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멈칫거리는 문장들은 나의 소극적인 의식의 투사이다. 나의 문장들처럼 나의 의식 또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유를 내세워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내면까지 헤아려 줄 정도로 그렇게 관대하지는 않다. 사정이야 어쨌든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은 흘러야 하고 문장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의 이면 146p
나는 이 세상에 잘못 보내졌다. 나는, 지금, 너무 외롭다.
그렇게 발음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나의 전신을 감싸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나는, 너무, 외롭다. 그러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나처럼 이 세상에 잘못 보내진 나의 형제, 나와 동일한 표적을 소유한 나의 동지, 나와 원형질이 같은 단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생의 이면 142p
자신의 외로된 섬에 스스로를 유배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지만,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며 한자 한자 적은 그의 소설과, 글로써 건네는 세상과 자신의 근원과의 화해는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님에도 생생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