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이 시대의 사랑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최승자의 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원초적이고 거친 단어들은 생소하고 놀라웠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어둡고, 부끄럽고, 외로움에 사무치고, 버림 받고, 축축하고, 흘러내리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존재,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혼재하는 그의 시를 사랑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스스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 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일찍이 나는>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졌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최승자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컴컴한 어둠속에서 괴로움을 파고드는 그의 시는 결국 삶에 대한 회한이고, 반성이며, 지독한 애착일 것이다.

시집을 보며 '시간의 웅덩이'라는 표현을 낚아 나의 언어로 새로 써본다.

고이고 고인 시간의 웅덩이에서
구정물을 길어 올린다.
한방울도 남지 않게
모든 구정물을 푸고
볕 좋은 오후 네시에 웅덩이를 바짝 말린다.
건조하지만 따사로운 흙으로
웅덩이를 채운다.
이제, 나의 시간은 고이지 않고
흘러갈 것이다.
한 번 생긴 웅덩이는 관성이 생겨
자꾸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촘촘한 흙으로
웅덩이를 채우고 발로 꽉꽉 밟는다.

제목은 뭐가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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