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years ago

한국영화에 있어 1996년은 매우 역사적인 해였다. 그해 20세기 한국영화의 표현 영역을 옥죄던 ‘사전 심의’라는 이름의 검열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받고 공식 폐지됐다. 이른바 문민 정부 출범에 따른 거대한 결실이었다. 또 하나, 바로 그해 홍상수라는 신인 감독이 출현했다. 또한 이때 김기덕도 등장했다. 이 두 감독이 한국영화의 검열 폐지와 같은 해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성을 갖는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에 전에 없던 새로운 물결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즈음 삼성, 현대, SK 등의 대기업이 영화 산업의 큰 물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다. 영화계에 대자본이 들어오면서 자기 역량을 마음껏 펼칠 박찬욱, 봉준호 등의 재능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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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전통의 계보를 잇는 가운데, 그때까지의 한국영화가 살피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회 정의라는 거대 담론을 축으로 삼은 이전까지의 한국영화들은 이를테면 광주 학살의 상처라든가, 산업화의 와중에 소외당한 하층민, 도시 빈민의 고단한 삶 같은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홍상수에 이르러 한국사회의 병증이 평범해 보이는 개개인에게 미치는 파장을 미시적으로 들춰내는 일상적 리얼리즘이 혁명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평론가들은 곧잘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영화를 ‘뉴 코리안 시네마’라는 수식어로 분류하곤 하는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그 신호탄 격의 작품이라고 평가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관객의 취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는데,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소수의 관객과 홍상수 영화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로 분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유럽의 적지 않은 관객과 소수의 국내 관객이 열광하는 ‘홍상수 월드’의 예고편과 같았다. 그리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지만 영화를 응시하다보면 불거지는 정서가 굉장히 특별해서 우리가 무심결에 스치는 일상적 관계들과 심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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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모두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잘 나가지 못하는 소설가 효섭(김의성)과 그를 사랑하는 극장 매표소 직원 민재(조은숙), 효섭이 사랑하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평범한 회사원 동우(박진성). 여기서 ‘사랑’이라는 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어이니 그대로 썼지만 사실 이들을 묶고 있는 정서를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왜냐면, 효섭은 보경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쩔쩔 맬 뿐이고 그를 팬이자 애인으로서 따르는, 그래서 효섭 입장에서는 만만한 민재를 대상으로 아쉬울 때만 성적 욕망을 해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경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동우와의 부부 관계를 껍데기만 간신히 유지하는 가운데 효섭을 만나는 걸로 숨통을 튼다. 현실이 너무 추레한 민재는 글을 쓰는 효섭을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 든다. 결벽증이 심한 동우는 지방 출장길에 충동적 성매매를 한 뒤 혹시라도 성병에 걸렸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는 아마도 아내 보경에 대해서도 결벽증적 의처증을 가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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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에서는 그 어떤 사랑의 내음도 나지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엇갈리는 욕망의 도돌이표와 치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관계는 복잡하고 악취가 난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들의 관계가 아름답지 않은 실마리를 이들이 각자 살아가는 삶 속에서 찾는 데 인색하지 않다. 인정 받지 못하는 소설가 효섭은 자신의 처지를 자책하는 걸 넘어 자존심만 거대해져 폭력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크나큰 열패감에 지배 당하고 있다. 그걸 가리는 무기는 “내가 만만하니?”라며 진짜 만만해 보이는 이들에게 공격적이 되는 것 뿐이다. 동우는 문제가 뭔지 정면으로 바라보는 걸 두려워한다. 보경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어떤 종류의 상처가 곪고 있어도 모른 척 하고, 뱅뱅 겉도는 것이다.

효섭과 동우, 두 사람 다 낯설지 않은 인물형들이다. 일상으로 내침한 우리 현대사의 그늘에는 징그럽게 깊게 파인 콤플렉스들이 꿈틀대기 때문이다. 혹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용감하게 해결하기보다는 모른 척 하는 회피도 익숙한 처세적 정서다. 보경은 탈출구 없는 세상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사실상 텅빈 집과 효섭의 집을 오락가락할 뿐이다. 이 사회의 최약자인 민재는 그런 인물들이 토악질을 해대는 시궁창 같은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래서 가장 큰 치명상도 그녀의 몫이다. 그게 해소되지 못하는 결핍과 욕망이 유통/소비되는 이 사회의 전형적 방식이다. 누군가는 싸지르고 누군가는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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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끝내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드는 부조리는 영화나 TV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늘 내가 탄 지하철의 옆자리 승객이나 피곤한 몸을 부린 귀갓길 택시 안에도 존재한다. 직장에서 스친 동료와 진상을 부리는 고객에게도 있다.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스팸 전화도 정서적으로 해악이다. 게다가 언제나 더 큰 상처는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서 온다.

나, 너, 우리. 홍상수의 출현은 바로 우리라는 세상을 보게 만든 거울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볼록 거울이 아닌 평면 거울. 내 등 어디에 먼지가 묻었는지 거울로 봐야 털 것 아닌가. 그의 영화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동어반복이라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25년 전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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