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2 years ago (edited)

무라카미 하루키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2편이 하나로 합쳐진 두꺼운 합본판을 빌려오면서 이걸 다 읽을 수 있을지를 제일 먼저 걱정했다. 그 정도로 긴 이야기였다. 번갈아 나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하루에 두 챕터씩, 읽은 후에는 바로 노트에 줄거리를 정리하며 꾸준히 읽어갔다.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데도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아무런 감상이 남지 않았다. 이건 뭘까 싶은 조용한 혼란만 있었다.

필사를 하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글을 옮겨 적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뭘 뜻하는 것이고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시 잘 이해해보고 싶어 오늘은 도서관을 찾아 얼마 전 반납했던 이 두꺼운 책을 꺼내와 마지막 챕터를 다시 읽었다.


집으로 돌아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엔딩을 전부 옮겨쓰기까지 했지만 아직도 뚜렷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을 떠도는 무언가를 언어로 치환하려 할수록 점점 뿌옇게 흐려지고, 소설 속 두 세계가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마지막 챕터. 셔플링 능력을 사용하는 계산사인 '나'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하루를 맞이하는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안정감을 주었다.

책을 제자리에 두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내게도 마지막 날이 정해진다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보았다. 소설 속 '나'처럼 나도 그렇게 담담하게 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싶었다. 한정된 인생을 한정되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젠가 죽을 것을 당연히 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죽음을 배제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을 비틀린 채로 내버려 두고 소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걸 마지막까지 지켜볼 의무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공정함을 잃게 된다. 나는 내 인생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나의 소멸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해도, 누구의 마음에도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또는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다. 물론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 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나 자신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잃어버린 것의 희미한 빛이 앙금처럼 남아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나를 살아 있게 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자 나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나 고독을 넘어선, 나 자신의 존재를 근원부터 뒤흔드는 높고 큰 너울이었다. 그 너울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나는 벤치 등받이에 팔을 괴고, 그 출렁거림을 견뎠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울 수는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고,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세계에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 존재한다. 그 슬픔은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가령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할 종류이다. 그 슬픔은 어떤 형태로도 바꿀 수 없고, 바람 잔 밤의 눈처럼 그저 고요히 마음에 쌓여 갈 뿐이다.

좀 더 젊었던 시절,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든 언어로 환치해 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늘어놓아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는 없었고, 나 자신에게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나는 나의 언어를 닫고, 나의 마음을 닫았다. 깊은 슬픔이라는 것은 눈물이라는 형태조차 띨 수 없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담뱃값이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종이 성냥이 있을 뿐이었다. 성냥도 이제 세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세 개를 차례대로 태워 땅에 버렸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을 때, 그 너울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머릿속에는 티끌처럼 고요한 침묵이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티끌을 오래도록 혼자 바라보았다. 티끌은 위로 오르지도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고, 가만히 거기에 떠 있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부는데도,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휘몰아치는 바람도 그것을 날려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에 헤어진 도서관 여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카펫 위에 쌓여 있던 그녀의 벨벳 원피스와 스타킹과 슬립을 생각했다. 그것들은 지금도 정리되지 않은 채 그 바닥에 그녀 자체인 것처럼 누워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공정하게 처신했던가? 아니,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누가 공정함 따위를 원한단 말인가? 아무도 공정함은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은 나 정도일 뿐, 그러나 공정함을 잃은 인생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녀가 좋았던 만큼 그녀가 바닥에 벗어던진 원피스와 속옷도 좋았다. 그것도 내 공정함의 한 형태일까?

공정함이란 아주 한정된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 개념은 모든 위상에 영향을 미친다. 달팽이에서 철물점 카운터와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도, 그게 아니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함은 애정과 유사하다. 내가 상대에게 주려는 것이 상대가 내게 원하는 것과 일치하진 않는다. 그러니 많은 것들이 내 앞을, 또는 내 안을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아마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후회해야 하리라. 그것도 공정함의 한 형태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후회할 수 없었다. 가령 모든 것이 나를 뒤에 남기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해도, 그것은 나 자신이 바란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게는 머릿속에 떠 있는 하얀 티끌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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