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숫가의 돼지들: 개막 - 버드와이저 타임(Budweiser Time) 15분 후steemCreated with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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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으나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 저우쉬런(周樹人)†,「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 1923년

그는 몸을 가누어 보려 애썼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가위눌린 듯, 뇌만이 기능한 채로 육신은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윽고, 눈앞에 어떤 희끄무레한, 아니, 다시 보니 붉은 빛으로 된 어떤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그의 앞 몇 미터 이내 거리에 있었다.
‘공화국의 적들을…….’ 그는 쪼개져버린 현판에 남은 글자들을 읽었다. 다행히 눈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몸을 가누어 보려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모두다 박살낼것이다’를 발음해 보려 했으나, 목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 ……! …….”
말은 목구멍에서 이루어져 나오지 못하며, 그저 짐승이 우짖듯 흘리는 신음이 되어 흩어졌다. 뒤늦게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팔꿈치 아래가 찢겨나가 붉은 살점과 끊어진 힘줄이 늘어져 있었다. 살아 처음으로 자기 몸의 내부구조를 육안으로 바라보며, 그는 시간차를 두고 밀려드는 고통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그의 뇌가 발작적으로 엔도르핀을 분비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그는 신음을 잇기보다 고개를 가누며 이곳저곳을 더 돌아보았다.
‘사무실’은 분해되었고, 곳곳에 철근 콘크리트의 파편이 방파제의 트라이포드 벽처럼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의 잔해가 그의 허리 아래를 깔아뭉개 그를 허벅지에서부터 구속하고 있었다. 탈출은?
그는 다리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지시에 대한 반환값이 오직 격통뿐임을 깨달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익숙했던 운신(運身)의 자유를 이제 영구적으로 상실한 것이다. 아니, 어차피 어디론가 훨훨 가 버릴 자유는 태생적으로 갖지 못했으므로 그는 단지 육체의 자유만을 박탈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지닐 수 있었던 유일한 자유였었다.
남조선 공군의 정밀폭격은 단 한 번으로 정찰총국을 무너뜨렸고, 오른손잡이인 그의 오른팔도 앗아갔다. 그리고 피도 앗아갔다. 이곳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오래지 않아 들이닥칠 자본주의자들의 지상군에게, 남은 왼손만이라도 들어 항복하고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힘겹게 만지며 파악해 보았다.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길어야 수 시간 이내에, 과다출혈 때문에든, 탈진 때문에든, 콘크리트 파편의 잔해가 절묘하게 그의 머리맡에 만들어낸 공기의 감옥 속 산소결핍 때문에든, 죽을 것이다. 그것은 동물적 감각이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발악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지? 그의 인생의 노정은 어디서부터 그를 인도하여 마침내 이 지하의 폐허 아래로 그를 데려다놓았는가? 그는 어느 남조선 시인의 글을 몰래 돌려 읽었던 김책공대 시절의 자신을 문득 떠올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는 어귀(語句)가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일순간 공감각(共感覺)의 기관이 생겨난 듯, 그의 눈 앞 회백색 콘크리트에 그 어귀가 새겨겼다. 그러나 그는 그 글귀가 자신에게 과연 적용될 수 있던가를 돌이켰다. 그 표현이 직설적이라면, 피와 포연(砲煙)으로 대화하는 이 동족들의 상잔(相殘)의 사북자리에서 그것은 흰소리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반어적이라면? 여전히 부족한 말이다─지금 이 지상에 펼쳐진 광경은, ‘아름다움의 반대’라는 말로는 그 수식을 못다할 터이므로.
“……! ……─! …….”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복록(福祿)이라는 망상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벗어나 있었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그로부터 고개를 돌려 찾아갈 다른 길이 없었지 않은가. 지금 이곳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에게 남아 있었을 다른 길이란 무엇이었던가? 인조고기를 먹다 부황(浮黃)이 들어 올챙이배로 죽는 유아? 꽃제비 되어 토끼풀 매다 위 속에 공기만 넣고 죽은, 그 뒤에 또 다시 누군가에게 그 주검을 먹힐 청진의 소년? 생각건대, 적어도 인민군 장교가 되기 전까지의 그는 오직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살아왔으며, 기실 김책공대에서의 세월도 돌이켜보면 먹고 살 길을 얻기 위한, 그리고 그가 택할 수 있는 길 가운데 그래도 적성에 맞았던 길의 한 갈래였던 것뿐이지 않은가.
그는 이미 꿈에서 깨어 있었다. 이팝과 지상락원에 대해 수령이 불어넣은, 전 인민을 위한 꿈은 그를 구속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후 목도한 현실에서 돌아설 길이 없었다. 그는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인이 되었고, 언젠가 이렇게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그 흐름을 바꾸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것을……군인의 길이라 생각하며 끝내 받아들여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예리한 하나의 감각─더 이상 엔도르핀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 고통이 그 관념을 끊어냈다.
“…….”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비록 경동맥을 다치지는 않았으나, 목울대가 무언가에 찢긴 것이다. 성대가 손상되었을 것이다. 오른손잡이인 그가 오른손을 잃었고, 군인인 그가 두 다리를 잃었으며 이제는 그의 목소리마저 영어(囹圄)의 것이 되었다. 이제 그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이미 증식을 시작한 ‘붉은달’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붉은달’은, 그의 사생아였다. 남조선 민관군(民官軍), 나아가 자본주의자들의 땅에서 태동한 수많은 인터넷의 연결선들을 넘나들며 그 취약점을 공격해 마침내 자본가들의 국가기간시설을 무력화할, 추상적 영역의 파괴자였다. 그것이 이미 남조선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연합군 통신망을 괴롭히고 있는 지금, 민간으로 ‘붉은달’의 마수(魔手)가 뻗어나가 인민들의 일상을 퇴보시켜 버릴 것은 불 보듯 눈에 선한 것이었다.
흔들리는 정신을 가누어 그는 생각했다.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 김책공대에서 전산학 공부에 매진하던 자신으로 그는 돌아가 있었다. 조국의 네트워크를 지켜내고 발전시키는 데에 순진하게 꿈을 품었던 시절, 그는 정보망의 혜택이 인민들에게 마침내 완전히 열릴 날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세상에 남길 유일한 유산, ‘붉은달’은 정확히 반대로 동작하고 있다. 앞으로 이 세상을 가꾸어나가야 할, 비록 자본주의자들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여도 분명 세상에 지은 죄 없이 순결한 어린 아이들이 ‘붉은달’이 파괴한 전산망으로 인해 퇴보한 문명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또한. 적어도 금전의 힘은 누릴 수 있을 자본주의자 진영의 아이들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의 조국 공화국 인민들의 아들딸들은 아마도 단매에 개가 맞아죽듯 외마디소리와 함께 죽어버릴 것이다. 그의 눈에는 이미, 민간의 의료영역으로 침범한 ‘붉은달’이 의료 인프라를 무력화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자신은 순수한 꿈을 꿀 자유가 없는 땅에서 살아왔다. 조국과 당이 지시하는 데에 복종하는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미 꺼져가는 이 생명의 마지막 불씨만큼은, 숭고한 조국 방위의 목표를 내걸지 못하는 불행한 사회주의자들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한 사람, 지킬 민간인이 있는 여느 나라의 군인으로서 손에 쥔 채 조용히 잠재우고 싶었다. 그는 또 다른 하나의, ‘붉은달’에 대칭되는 유산을 남겨야 했다.
붉은달이 노리는 공격원(Attack Vector)들을 보강하기 위한, 본래는 그의 조국 전산망이 붉은달의 범람을 비껴가도록 하기 위해 설계하고 작성하였던 패치 노트와 보안 키트의 소스코드가 그의 PC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본이, 사이토(斎藤) 이등위의 자리에도 하나 있을 것이고, 사무실 내의 저장고에도 하나 있을 것이고, 그리고……완벽을 기하기 위해, 당의 감시를 피하며 다시 그 소스코드를 보강한 개량형 키트의 소스코드가 그의 숙소, 윗목의 장판을 들어내고 나면 그 안에 조그맣게 파 놓은 홈 안에, 낡은 천으로 고이 싼 다섯 장의 플로피 디스크에 나뉘어 담겨 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이 폭격으로부터 부디 남아 있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허벅지에 박힌 철근 파편이 그의 남은 다리근육을 찢어놓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몸을 뒤틀어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쇳조각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어색한 필치로, 왼손으로, 주변의 콘크리트 조각마다 그의 기록을 새기기 시작했다.
「붉은달의 대책
소스코드
콤퓨타, 롯뜨번호89-1176아르빠
/mnt/170HDDxaNN에 마운트된하아드에 있음
콤퓨타, 롯뜨번호모름, 욱일 여군 ‘사이또오’의 것, 하아드에 사본 있음
저장고에 사본 있음
나의 숙소 장판 아래 사본 있음
인민의」
적다, 그는 망설였다. 무엇을 위해, 어찌 보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조국의 대의에 반역하는 행위와 같은 이 일을 하는가? 그러나 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다시 그의, 이념 앞에서 흐려질 뻔했던 정신을 질책하며 깨웠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어버이’ 수령을 모실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의 진영에 굴종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곧 죽을 이 순간만큼은 김일성주의의 앞잡이가 아니라 단지 사람으로서, 군인으로서, 진정으로 자신이 지켜냈어야 할 것을 지키겠다는 열망을 품고, 눈을 감고 싶었다. 조선의 이름을 평생 등에 지고 살아야 했던 자로서 행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자유였다. 여기에 실패한다면, 끝내 그는 태생적으로 길을 잘못 든 민족의 일인으로서 남을 따름이었다.
「생명권을 위하여
남긴다.
대위 ㅊ」
적다가, 그는 끝내 철필(鐵筆)을 떨어뜨렸다. 시야가 작은 동그라미 모양으로 닫혀가고 있었다. 왼손이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았다. 출혈이 이미 컸던 것이다. 그의 뇌는 혈액이 더 이상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없는 이상, 몇 분 내에 정지할 것이다.
분했다. 그는 붉은달의 작성자 무명씨로 남고 싶지 않았다. 이 콘크리트 조각이, 제발, 남조선군의 누군가에게 전해져 마침내 붉은달을 막아낼 대항마를 마련해 줄 것을 바라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그 대항마의 작성자로서 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최」
그는 자신의 성을 가까스로 적었다. 그러나 도저히 다음은 불가능했다. 그는 다시 철필을 떨어뜨렸다. 이름을 적을 힘이 남지 않았다. 눈을 카악, 치뜨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이렇게 눈을 감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치, 노려보노라면 콘크리트 조각의 여백에 그의 이름이 새겨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콘크리트 조각을 노려보며, 마지막 시야가 동그란 점이 되고, 그리고 마침내 닫히는 순간까지,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 이미 현실을 더 볼 수 없는 시야에 떠오른 것은, 과거, 붉은달을 작성하던 초기의 나날이었다. 그가 저승길 노자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회한(悔恨) 외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시간의 태엽을 되감을 수 없었으므로─.

† 중국의 문필가 루쉰(魯迅)의 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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