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숫가의 돼지들: 개막 - 버드와이저 타임(Budweiser Time) 13개월 전steemCreated with Sketch.

in #fiction7 years ago

coverImage.png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

  • 에릭 아더 블레어(Eric Arthur Blair)†, 「동물농장(Animal Farm)」, 1945년

그는 불 꺼진 내무실 안에 있었다.
창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평양의 시월 말에는 드문 비였다.
우의를 챙겼다. 비록 휴일이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지금 그가 맡아 작성하고 있는 모듈을 마무리하기까지는 단 엿새의 말미만이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패하더라도 형식적 자아비판 후 윗선의 중좌(中佐)에게 밀주(密酒) 몇 잔을 올리는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하전사(下戰士) 하나가 경례를 했다. 그는 수례(受禮) 후 전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 너머, 1인 2PC 환경이 구축된 그의 ‘전투좌석(deck)’이 그를 반겼다. 한쪽은 내부용 폐쇄망, 다른 한쪽은 외부 통신망이 연결된 군관(軍官)††용 자리였다.
얼마 전부터, 그는 코드를 짜고 있었다. 그의 모듈은 현재 소속된 분과의 성과물 가운데에서도 7할 가량을 차지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완성되고 나면, 하나의 완전한 익스플로잇 킷(Exploit Kit)을 빌드해낼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것은 며칠간 가상환경 내에서 날뛸 것이고, 아마도 합격 판정을 받을 것이다……한동안 불면(不眠)의 밤을 겪으며 그는 자신이 기한 내에 이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있을지 때로 불안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의식으로부터 차츰 의식의 수면 위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성공할 것임을. 분명,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하이퍼바이저(Hypervisor)의 도메인(Domain)을 넘나들 것이다. 이윽고……적들의 네트워크 중심전 교리가 무력화될 때까지.
다만 그의 불면을 부추기는 것은 업무 진척도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자리에 앉은 지 채 30여 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눈 안쪽이 뻐근해져왔다. 눈물이 부족한 것이다. 뻑뻑한 눈을 감고, 눈꺼풀 위를 지그시 누르며, 그는 이 가느다란 불쾌감 그리고 약간의 소양감(搔痒感)이 조금이나마 가시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물을 따라 마시며, 의자의 등받이에 잠시 몸을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눈을 뜨고, 그는 마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회칠한 자리가 누렇게 뜬 콘크리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일을, 왜 하는가?
그는 새삼 자문했다. 그 어떤 외침(外侵)도 당장은 없는데, 지금 이 일을 왜 하는가. 이 일의 결과물은, 순수하게, 상대 전산망의 교란과 비가역적인 파괴이다.
파괴.
후대에 무엇을 남기기 위해, 그는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얼마 부술 것도 없는 거지떼의 세간을 남김없이 짓이겨밟아 반동(反動)들의 소굴을 남김없이 소탕하라는, 당의 명령을 위해? 작전을 위해서 남측에 대한 정보를 실제로 접하고 있는 사이버전 담당 군관들에게, 그 명령이 제대로 먹힐까?
당장 그 자신도, 남쪽이 매우 번영한 지역임을 알았다. 그것은 중공(中共)이 조선보다 번창하다고 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임도 알았다. 남녘의 동포들은, 분명 ‘부귀’를 누리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도리어 그 자신이야말로, 당의 프로파간다에서 남조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괴뢰(傀儡)의 말로,’ ‘빈곤의 극치,’ ‘굶주림 앞에 부모가 제 자식을 파는 지경’ 따위의 말이 조선에 도리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어떤 여느 사람보다도 잘 알았다. 사이버전을 수행하면서 그는 무수한 광명이 남조선의 네트워크망을 타고 흐름을 보았다. 최초의 웹사이트가 개장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태동기임에도, 이미 남조선은 수 년 내에 인터넷의 일반인용 서비스 개장이 가능할 수준으로 전산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지구의 사진에서, 온통 밝은 반딧불의 꽁무니처럼 발광하는 도시들이 점점이 눈에 띄는 가운데 단 한 곳, 마치 요참형(腰斬刑)을 당한 듯 용천평야로부터 원산만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선, 그 위로 암흑지대가 펼쳐져 있는 광경도 보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세계가 자신의 고향, 뿌리임을 알았다.
또한, 그는 알았다─이민족의 괴뢰(傀儡)로서 압제와 학대 앞에 내던져져 피골 상접한 동포, 그 가여운 이미지가 기실 그 자신의 오누이에게 들씌워질 때 차라리 더 어울리는 것임을 알았다. 조선에 있는 자신들은 동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한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사실 동포는 그 어떤 가난의 소굴로부터도 굳이 ‘해방’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지금, 조선이 남조선의 동족들에게서 ‘미제’ 이민족을 몰아내고 서로의 터전을 합치려 하는 것은, 말하자면 조선 민족의 수준을 평준화, 그것도 하향평준화하는 행위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러나, 필요하다고 한다. 노동당은 그렇게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남조선에서 한때 봉기를 준비하며 20만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였었다는, 남로당(南朝鮮勞動黨)의 유지를 받들어서? 공산혁명을 한다며 일단 강도질부터 배워온 먹물쟁이들의 남민전(南朝鮮民族解放戰線)의 슬로건을 되새겨서? 아니면 주체사상의 자생적 신봉자 민혁당(民主民族革命黨)의 심지를 그리며?
그렇게 정당화하여, 이민족의 괴뢰로서 즐기는 단 꿀보다 동족과 더불어 척박한 동토(凍土)에서 캐어먹는 돼지감자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남조선 인민이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목을 매리라고 정말로 믿는가? 당 중앙의 수뇌들 스스로부터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아니, 일단 그들이 정말 이민족의 ‘괴뢰’라는 것은 확실한가?
하. 그는 웃었다. 지금도 저 창 밖 너머, 기지를 벗어난 먼 곳 그 어디메의 ‘지상낙원(地上樂園)’에는 그 ‘우월한’ 조선 민족의 “자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삶을 누리는 동족의 살을 주검에서 발라내 굽고 있는 꽃제비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의하지 않으리라. 조선인 동족의 그 인육을 소화해 똥으로 누어 내보내며, 놈들은 배 곯는 것보다 중한 문제가 과연 있기나 한가에 대해 온 몸의 땟국과 그 몰골로 답하리라. 그러면, 민족의 반역자는……그 자신일까?
부유한 동포의 모습을 질시하며, 그로부터 어떻게든 흠집과 약점을 찾아내어 자신과 같은 수준의 흙탕물 구덩이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귀신의 모습이 우리 공화국의 그것이며, 공화국의 일원인 자신은 결국 동포의 부와 평화를 해치고자 하는 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민족반역자의 이름은 자신이 스스로 들씌울 것이 아닐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옛 고구려로부터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워왔지, 하며 그는 자조했다. 조선은 고구려의 영토도, 역사의 명분도, 국력도 이어받지 못했지만 분명 단 한 가지, 고구려와 닮은 점이 있기는 했다. 적어도 초기의 고구려라면, 인근의 소국이나 한족계 국가를 약탈하며 식량 수요를 충당했던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은 바로 그 약탈경제에 대한 열망에서라면 초기 고구려 시대의 봉건 정권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의 후예가 맞기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선조들에 비하면 지금의 조선이 더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차마 가릴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적어도, 선조들은 자신들이 누군가를 ‘약탈’하고, 다른 부족 어버이들의 곡식을 갈취하여 제 새끼를 먹인다는 행위 자체는 인정했다. 낯 뜨거운 도적질에 다른 신성성(神聖性)을 부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도둑질을 신성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옛 적들을 이 땅에 불러들였다.
그는 물을 마시며, 잠시 일어나 먼발치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욱일민주주의인민공화국(旭日民主主義人民共和國)에서 파견된 무관이 그의 직속상관인 김민 대위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름은 시라이시(白石)라고 했다. 그가 좋아하던 어느 시인의 필명(筆名)과 성씨가 같아 조금 인상을 기억에 남겨두고 있었다. 군인답지 않게 턱선이 부드럽고 인상이 순했지만, 군용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전문가여서 인망이 높은 것 같았다. 그는 조-일 군사협정에 따라 지난달부터 조선에 파견되어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을 필두로, 재기를 위해 각국의 자원 및 기술을 최대한 교환하며 국력을 상향평준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의 자금과 첨단화된 무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말해서 분명 열세에 놓여 있는 사회주의 진영 각국이 각개격파당하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조선과 욱일 간에도 욱일 측의 선진적 기술을 입수하고 조선에서는 욱일군에게 부족한 지상군 장비를 무상임대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얼마 전부터, 동맹국들로부터 파견된 훈련 담당 군사고문(軍事顧問)들이 귀국하고 있었다. 작전지원고문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당장 그가 근무하고 있는 이곳 제121국의 개발팀에서도, 저 시라이시는 소련에서 파견된 블류헤르(Блю́хер) 상위(上尉)와 더불어 멀웨어(Malware)††††의 연구개발을 본격 지원하고 있었으며 성능 강화에도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옛 침략자의 후손과 옛 피지배자의 후손이 결탁한 것은 역설적이다. 그리고 그 연합체가 이제 옛 피지배자의 다른 후손을 필두로 하여 자본주의 진영을 무너뜨리기로 결의한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피보다 진한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하나의 증명일까? 그렇다면 피보다 진한 그것은 무엇인가? 사회주의의 이념?
적어도 사회주의의 이념이 피보다 진한 것을 위한 투쟁을 인정한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계급이 민족에 우선하며 혈육에도 우선한다고 보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회주의의 이념보다 진하지 않은 것은 필요에 따라 폐기처분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하는 사상이었던가?
그곳에서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든, 동족을 침략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발견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곧 다시 코드를 짜기 시작했다. 사이버군 전사로서, 그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이었다. 당이 군에 내린 임무를 완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하며,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당연히 지금의 그에게 항명(抗命)은 허용되지 않겠지……그러나 현실적으로 내다보면, 이 두 체제의 대결에서는 자본주의의 진영이 승리할 것이다. 현재 부를 거머쥔 자가 미래의 부를 누릴 가능성이 당연히 더 크며, 오늘날 힘은 곧 부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지금 보다 큰 힘을 보유한 쪽은 자본주의 남조선, 즉 나아가 미국이었다.
그는 체제대결의 종말이 오는 날을 상상했다. ‘원쑤’ 미제(美帝)를 이 땅에서 소탕하리라 자신만만하게 몸을 내던진 인민군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 이미지가 몹시도 선명했다─그를 비롯하여, 조선인민군에 복무한 자들은 모두 처벌받을 것이다. 특히 그와 같은 군관급은 거의 모두 처형당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자신이 지금 전쟁범죄의 한 축을 짊어지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더라도 당장은 그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일을 해야 했다.
그는 군인이었으니까.
결국,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순간이 오고 그때 그의 손에 시간의 태엽이 주어져 그것을 되감을 수 있다 해도, 지금과 같이, 그는 이 일을 할 것이다.

†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본명이다.
†† 북한에서는 장교 계층을 ‘군관’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에서 장교를 호칭하는 다른 용어인 ‘사관’은 북한에서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계층을 부를 때 사용한다.
††† 팀 버너스 리 경의 WWW은 1989년에 탄생했으며, 최초의 WWW 연결 웹페이지는 1991년 8월에 개장하여 작중 시간대보다 4개월 가량 앞서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한 것은 1994년이었다.
†††† 이른바 '멀웨어'란, 공격 대상 시스템에 그 사용자가 의도치 않은 행위나 사용권한의 변경, 탈취, 혹은 시스템 자체에 대한 대미지를 가하는 동작 등을 가할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소프트웨어를 가리킨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6
JST 0.030
BTC 65739.28
ETH 2626.92
USDT 1.00
SBD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