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숫가의 돼지들: 1부 - 사관과 숙녀(1)steemCreated with Sketch.

in #fiction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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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목적) 본 영은 일본통치시대의 창씨 제도에 의하야 일본식 씨명으로 변경된 조선성명의 간이복구를 목적으로 함.
제2조 (일본식 씨명의 실효) 일본통치시대의 법령에 기인한 창씨 제도에 의하야 조선성명을 일본식 씨명으로 변경한 호적부 기재는 그 창초일부터 무효임을 선언함. 단, 창씨 개명하에 성립된 모든 법률 행위는 하등의 영향을 수치 아니함.
호적리는 본 영 시행일부터 60일을 경과하지 않은 기간에는 호적 개정 수속을 하지 못함.
일본식 명을 종전과 갓치 유지하고쟈 하는 자는 본 영 시행 후 60일 이내에 그 뜻을 호적리에게 계출함을 득함.
그 경우에 호적리는 호적의 개정 수속을 하지 않이하고 종전의 일본식 명을 완전히 보유케 함.
전항의 경우 이외에 호적리는 본 영 시행일부터 60일을 경과한 후 현행 법령에 의하야 일본식 씨명을 조선성명으로 개정함을 요함.
제3조 (명의 변경) 일본통치시대의 법령에 기인한 일본식 명의 출생 신고를 하야 조선명을 갔지 않은 자는 본 영 시행 후 6월 이내에 호적리에게 조선명으로 명 변경을 계출함을 득함.
그 경우에 호적리는 호적부의 명 변경 수속을 함.
기간 만료 후 일본식 명을 변경하고자 하는 자는 현행 법령에 의하야 소할재판소에 명 변경 신청을 할 수 있음.
제4조 (본 영에 배치되는 법령 실효) 본 영에 배치되는 모든 법령, 훈령 급 통첩은 그 창초일부터 무효로 함.
제5조 (효력발생) 본 영은 공포일부터 효력이 생함.

  • 조선 미군정사령부, 「미 군정법률 제122호 포고문」, 1946년

“…….”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체 여자치고는 짙은 편인 그녀의 눈썹이 요즘은 눈꼬리를 넘도록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벌써 서른 즈음에 다가서노라니, 이런 곳에서부터 육체에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싶었다. “どのようにしないで、私は年齢が聞いたより(우야꼬, 나이 먹나 보다).” 문득 중얼거리다, 그녀는 흠칫했다. 요사이는, 근무 중이 아닐 때면 사투리도 더 세지고 심지어는 집에서 쓰는 말까지도 곧잘 튀어나왔다. 확실히 나이가 들기는 들었는지, 언어습관도 점점 더 그녀가 남은 생에 걸쳐 일관되게 굳히게 될 그 무언가의 형태로 수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눈에 띄게 생긴 것은, 미묘하게, 20대 초반에 비해 ‘그것’이나 ‘이것’ 같은 대명사의 사용이 늘었다는 점(“이거를 저거해서 거기다가 그렇게 그때 말이야…….”), 정확한 표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아 다른 표현으로 에둘러치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로는 아마도 그녀와 같은 일본계 한국인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일본어가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올 때가 많아졌다는 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무 중이나 평소에야 당연히 한국어를 썼지만 고향 집에 가서는 일본어를 많이 쓰니까. 아무래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일본어가 모국어인 세대 분들이셨고, 부모님만 해도 집에서는 일본어를 듣고 자라오신 분들이었던 터라, 모국어로는 한국어(정확히는 경남 진해 지역 사투리)를 뇌에 깔아 놓은 그녀로서도 입에 일본어가 많이 배어 있었다. 그녀와 같은 일본계 한국인 2~3세라면, 너나없이 이중언어구사자(bilingual)이게 마련이었으므로.
물론, 이건 고등학생 시절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게 되고서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정작 그녀와 가족들의 일본어는 일본 표준어도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본 큐슈(九州) 지방의 가고시마(鹿兒)라는 곳 출신이셨고, 당연히 흔히 말하고 배우는 ‘일본어’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 배운 것이지만, 너무 차이가 큰 사투리이다 보니 외국인들이 알아듣기도 어려워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日帝)†는 가고시마 사투리를 암호 전문 작성용 언어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가정에서 쓰고 있었으니……그녀는 한국어든, 유일하게 잘 구사하는 외국어든 모두 사투리로만 배운 것이다. 영어는 그나마 사투리로 배우지 않아 다행이지, 싶었지만 누가 아는가? 그녀의 귀에 익은 영어 발음이 사실은 또 미국 남부 어디메에서 주로 쓰는 사투리의 발음이었을지. 그리고 솔직히 알파벳 쓰는 외국어와 그녀는 친한 편은 아니었다. 차라리 미국 사투리가 더 나을 정도의 발음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그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전 일곱 시 20분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옷장을 열었다. 빨래를 잊었던 터라 우드랜드 위장무늬 전투복은 조금 쭈글쭈글했고 말끔한 옷은 구형 민무늬 전투복뿐이었다. 오늘만 한 번 더 입지 뭐, 하며 그녀는 우드랜드 전투복을 걸쳤다. 조금 쿰쿰한 냄새가 올라오나, 도 싶었지만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녀의 복무지인 공군 제371방공포병포대†††는 독립포대에다 상급부대에서 자주 시찰을 나오기도 곤란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곳이어서 포대장이 왕이었고, 그녀는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여군 포대장이었다. 여군인지라 남군들이 스스럼없이 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더해서, 그녀는 이런 사소한 문제로는 누구에게도 태클이 걸릴 일이 없었다. 그녀를 포함해 여군이 둘일 때도 그랬지만, 오직 그녀만이 포대 내 유일한 여군이 된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한 달 전, 자신이 포대장으로 느닷없이 영전(榮轉)하게 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계기는 어느 불유쾌한 사건으로부터였다.
그녀는 1990년의 여군 병과 해체 당시 방공포병으로 병과를 옮겼고, 이듬해 육군에서 공군으로 방공포병전력이 발칸 등의 초저고도 화기전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통째로 전군할 때 소속군도 옮겼다. 그 직후 대구 소재 제1방공포병여단 예하 독립포대에 배치받아 대위로서 부중대장 직함의 포대 참모가 되었다. 그녀의 직속상관이었던 전임 포대장은 또다른 포대 참모인 운영계장을 데리고서 육군의 다른 어느 부대인가에서 내리꽂힌 양반으로서, 대나무 아홉 묶음(영관 계급장을 말한다)의 개수를 하나에서 둘로 늘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소령 계급의 사나이였다. 그는 자신의 심복 역할을 하던 중위를 데리고 다니면서 처음에는 사우나, 그 다음에는 단란주점을 평정하더니 결국 그 뻗치는 양물(陽物)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릇된 곳에 손을 댔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앳된 여군 하사의 엉덩이가 사십 줄 초의 그에게는 아마도 유원지의 놀이기구와도 같은 그 어떤 아름답고 즐거운 탐닉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더 발칙한 것은, 소령의 심복 중위까지도 덩달아서 그 하사를 농락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들은 성(性)군기 위반 사실이 발각되어 칼을 맞았고, 사관학교를 나와 대나무 두 묶음쯤 거뜬하리라던 소령의 믿음은 자신이 통계상 고작 9%의 사관학교 출신 중령 진급 실패자가 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사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 바람에 그녀는 느닷없이 포대장으로 승진했고, 운영계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가 신임 장교를 새로 받아들일 예정이었으나 아직까지도 인원 충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장교 충원율 66%의 부대에서, 행정소요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버린 데에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이 고난을 기회로 삼아 쾌속진급을 현실로 만들리라고 다짐하던 참이었다……. “앗!”
생각 끝에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내질렀다. 오늘은 후줄근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 운영계장 보직의 공석을 채울 새 장교가 오늘 그녀의 부대로 전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친구였더라? 이력사항이 조금 눈에 띄었다. 현재 공군 방공포병사령부 예하부대 소속원 절대다수는 육군에서 군생활을 시작하여 올해에 공군으로 전군(轉軍)한 사람들인데, 그 신임장교는 특이하게도 공군 임관자로서 이 육군 출신자들의 텃밭인 방공포병사령부로 과감하게 전속(轉屬)을 신청한 친구였던 것이다. 풍문으로는 강제차출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꽤 당돌한 성격이 아닐까 싶어 그녀는 내심 걱정이 되고 있었다. 얕보여서야 곤란하지, 하며 그녀는 비록 시간은 빠듯했지만, 서둘러 옷을 벗어던지고 잘 다려 놓은 구형 전투복으로 갈아 입었다. 후줄근한 데다 얼룩덜룩한 무늬로 가득한 신형 전투복보다는, 그래도 역시 근무용 약복에 가까운 민무늬 전투복이 오늘처럼 격식을 차려야 하는 날에는 아직 좀 더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단위부대 지휘관으로서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에도 오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작중 소수민족인 ‘일본계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용어로, 조선을 강점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국가로 칭하고 있다.
†† 정작 미국에서는 가고시마에서 이민을 와 미군에 입대한 병사들을 데리고 있었던 터라, 쉽게 이 암호를 풀어 버렸다.
††† 대한민국 공군 방공유도탄사령부(舊 방공포병사령부) 예하 제1방공유도탄여단 예하 제xxxx부대를 모티브로 한 가공의 독립방공유도탄포대급 부대이다. 작중 시점은 육군에서 공군으로 방공포병전력이 전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대 초반이므로, ‘방공유도탄’이 아닌 ‘방공포’라는 특기명이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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