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Thinking) 아버지의 은퇴

in #fathe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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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지가 술을 한껏 자시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큰 딸, 이리 좀 와봐. 할 말이 있어."
평소 술 취한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별로 내키지 않은 터라,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빠가 이제 은퇴할 때가 다 된 것 같다."
연말만 오면 시작되는 똑같은 레퍼토리가 다시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신데요?"
"같이 일하는 팀에서 아빠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했다네...... 후......"
어라? 이건 내가 생각했던 레퍼토리가 아닌데?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에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의 나이...... 그러고보니 우리 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됐더라?

나의 아버지께서는 나의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늘 회사를 다니셨다. 우리 아버지는 회사원이라는 프레임이 너무나도 공고해서 아버지께서 은퇴를 한다거나, 다른 일을 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은퇴를 걱정해야 할 연세가 되셨다니,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니 퍽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나도 내가 속물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실 처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집의 생계 문제였다. 외 벌이 가장으로 우리 집의 생계를 이끌어오신 아버지가 직장에서 은퇴를 하시면, 분명 우리 집의 생계는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니, 아버지가 회사를 좀 더 오래 다니실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좀만 더 참고 다니시면 안 될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래도...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 아버지였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것도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그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늘 무섭고 강한 사람 같았던 우리 아버지가, 어떤 시련이 와도 굳건할 것만 같았던 우리 아버지의 상처가 이제야 보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참 고생이 많으셨겠구나......

나는 한 때 회사에서 잠깐 근무를 했었다. 경험을 쌓고 학비를 벌 목적으로 시작한 일은 꽤 즐거웠다. 업무의 로드가 심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적응하니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일하는 분들께서 너무 잘 해주셔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런데 너무 편해진 탓일지 몰라도 일의 후반부로 갈수록 똑같은 일이 지겨워졌고, 그러다 보니 업무에 임하는 나의 자세도 처음보다는 열정적이지 않았다. 잘해주시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당연함으로 이어지게 되며, 나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의 말 한 마디로 미움을 사게 되었고, 나 또한 말 한 마디로 상처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말이 뭐 대수냐. 그냥 무시하고 버텨라.' 하지만 나는 이 사회에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고작 말 한마디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업무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업무를 함께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 또한 말 한마디가 가진 날카로움을 경험해 보았기에, 문득 나의 과거가 떠오르며 그제야 진정으로 아버지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차마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가 가여웠고 안타까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나는 아버지의 은퇴가 현실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그 이후에 찾아올 후 폭풍이 너무나도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은퇴 후 아버지가 받을 상처가 더욱 공포스럽다.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차마 볼 자신이 없다. 늘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스스로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 넣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아버지를 자꾸만 관찰하게 된다. 아버지의 스토커마냥 밤 늦도록 잠들지 못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함께 잠들지 못 하는 밤이 이어진다. 한 가정의 가장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에서 부디 아버지가 무너지지 않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기를 바라는 일 뿐이다. 그리고 소망하건대, 늘 가족을 위한 결정을 내리셨던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을 하셨으면, 늘 아버지에게 부탁하기만 하는 큰 딸이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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