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책리뷰, 서평] 코스모스, 칼세이건

in #cosmos6 years ago

[ 코스모스, 칼세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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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출판된 책이며, 한국에는 2004년 홍승수 님이 번역하여 최초 발간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읽은 우주과학 분야 최고의 책이다.
우주과학 책이지만 인문학 배경도 충분히 반영되어 있어 딱딱하지 않고 읽힘이 좋다.

700페이지의 과학 책, 사실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다양한 분야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는 필독서라 꾹 참고 읽었다.

책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감명 깊은 부분에 대해서는 기록을 해두었고 어려운 부분은 과감히 스킵 했다. 나는 우주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공식이나 수치 계산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칼 세이건이 이야기 하는 우주, 우주 속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유일무이한,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주의 미래를 어떻게 설명 하는지 보았다.
나에게 우주 [COSMOS] 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을 때, 단지 여러 공상과학 영화를 통해서 우주를 인지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거대한 생명체의 한 부분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인간에게 오장육부가 있고 수많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우리 인간이 우주라는 생명체의 미세한 입자가 아닌가 말이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지구 너머 저 은하계 너머 어딘가에서 우리와 비슷한, 어떤 생명체를 발견하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험하는 것이 결국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라는 생명체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우주에 대한 광대한 내용에 대한 서평을 하려 하니 너무나도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중 한 부분일지라도 내 생각과 함께 써 보겠다.

우주과학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 약 2000년 전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P347
기원전 600년 경 탈레스는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와 수평선 위에 떠오른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다. 오늘날에도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의 높이를 잴 때 똑같은 방법을 쓴다. 탈레스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유클리드보다 먼저 증명한 인물로 통한다. 예를 들어 이등변 삼각형의 두 밑각이 같다는 정리들 말이다. 따지고 보면 탈레스는 유클리드로 연결되고, 유클리드는 아이작 뉴턴으로 이어진다.
탈레스는 신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탈레스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이오니아로 가져온 천문학과 기하학 등의 새로운 씨앗이 그곳의 비옥한 토양 덕분에 튼실한 싹을 틔우고 과학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선인들의 호기심이 이끌어낸 문명의 과학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신이 내린 벌로 생각했던 병, 신의 숨소리라 여겼던 공기 등, 그야말로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을 증명하고자 계속 연구했고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공과같이 둥글다고 추론한 역사상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리고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로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P482
창조주가 세상을 빚었다고 주장하는 아둔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창조됐다 함은 그릇된 가르침이며 버려 마땅한 가르침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은 창조 이전에 어디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신이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만일 신이 유를 만들고 난 다음,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유란 것이 또 무엇에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끝없이 이어지는 논리의 순환 고리에 사로잡히고 말뿐이다. 세상은 창조되지 아니했으며 시간 자체가 그러하듯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없음을 명심할지어다. 이는 또한 진리에 기초한 것이니.

  • 마하푸라나(위대한 신화), 인도 자이나교, 9세기
    과학은 인간의 끊임없는 의문과 고민 그리고 탐험을 통해서 발전해왔다. 2000년 전에 이미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물리적인 반응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이 가게 될 길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에 기대어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라 생각하며 의심을 멈춰버리긴엔 너무 많은 것들이 우연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겨내고 과학을 놓았다.

성경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한다. 신앙 자체에 대해서 나는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한다면 태초는 언제이며 어떤 모습인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연구해온 우주에 '신'이란 존재는 무의미하다. 먼 훗날 우주의 수축이 시작되어 빅크런치 (Big Crunch:우주멸망)가 오면 세상은 다시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우주 팽창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증명되지 않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우리의 근원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우주의 껍질을 아주 천천히, 하지만 고집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언제가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그곳 그 시간에 도달할 것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P294
도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지구라는 사실의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지구의 유일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게 했으며, 지구 이외의 장소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훌륭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태양계 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케플러는 다른 별들이 행성계를 거느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 아닌 자신들만의 중심 별 주위를 각기 궤도 운동하는 행성들이 우주에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은 아마 조르다노 브루노일 것이다.

“만약 천상의 실상이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위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 무한히 큰 공간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다. 창공에 빛나는 저 많은 별들이 모두 그 나름의 태양으로서 중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기 주위에 행성들을 거느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천상의 사정이 실제로 그렇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들이 무한히 넓은 우주 공간에 있다고 해도 누가 뭐랄 수 없지 않은가?...”
16세기 조르다노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신성은 전 우주를 꿰뚫는 생명이다." 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으로 판정되어 1600년에 화형을 당했다.
현대에 생각해보면 당연한 생각이겠지만 그 당시 상황 (천동설이 지배적인 우주관) 에서는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 주장이었다. 하지만 조르다노 브루노를 통해서 우주에 대한 의문은 더 커졌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자리 잡게 되었다.

P374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 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플라톤주의자들과 그들의 기독교 후계자들은 지상의 세계는 때 묻고 골치 아픈 곳인 반면에 천상계는 완벽하고 신성하다는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우주 시민으로서 지구인의 위상을 망각한 채 살았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오니의 마지막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와서 지적 깨달음의 중심지가 위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소실됐다. 그는 월식 중에 달의 표면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옳게 추론했다. 그다음에 따라올 결론은 뻔하다. 그는 태양처럼 큰 물체가 지구처럼 작은 물체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추론했다.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 한 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가 ‘코페르니쿠스’하면 떠올리게 되는 생각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태양 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한 사람”이라고 기술했지 태양 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있었던 180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행성의 배열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이미 기원전 280년경에 완벽하고 명확하게 밝혀졌던 것이다. 지동설은 아리스타르코스의 동시대인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낙사고라스, 브루노, 갈릴레오 등에게 던져졌던 반대의 외침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타르코스를 불경죄로 처벌하라는 아우성의 강도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 할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를 적대시하려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일종의 지구 중심 우주관에 사로잡힌 우리는 아직도 일상적으로 “해가 뜬다.” 하고 “해가 진다.” 한다. 아리스타르코스 이후로 220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의 마루는 여전히 지구가 돌지 않는 듯하다.

재밌는 이야기다. 현재까지 입증된 내용을 기반으로 할 때, 태양계에서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으며 태양계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천동설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냥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우주과학의 발전이 많은 것을 입증하고 증명하였고 인간은 우주라는 아주 거대한 존재 속에 먼지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증명된 내용을 제대로 인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주적 사고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이 중심이라는 사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P384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인류라는 종의 유아기, 우리의 조상들이 조금은 게으른 듯이 하늘의 별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던 바로 그 시기에도, 그리고 고대 그리스로 와서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의 시대에도, 어디 그뿐인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이라는 질문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행성은 따분할 정도로 그저 그런 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별은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이에 잊혀진 듯이 버려져 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라는 것도 뭐 그리 대단한 존재도 못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주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겨우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러 그렇고 그런 ‘식구’ 일 뿐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되기까지 우리는 하늘을 보고 머릿속에서 모형을 구축해 보고 그 모형에서 귀결되는 관측 현상들을 예측하고 예측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예측이 실제와 맞지 않을 경우 그 모형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모형을 다듬어 왔다. 생각해 보라. 태양은 벌겋게 달아오른 돌멩이였고 별들은 천상의 불꽃이었으며 은하수는 밤하늘의 등뼈였다. 이론적 모형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또 파기하는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용기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아리스타르코스 이래 과학자들의 임무는 우주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한발씩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물러서기는 계속됐다. 새로운 자리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섀플리와 허블의 발견들을 목격했던 세대들이 아직도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한 발짝 한 발짝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마다 강등당하는 인류의 지위를 한탄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슴과 가슴 깊숙한 곳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초점이며 지렛대의 받침목이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아직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 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바깥세상이 어떠한지 알아내는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의 행성 지구가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지구를 위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의 생명 종으로서 그 유년기부터 품어 왔던 질문을 가슴에 안고 우주 항해의 첫발을 내디딘 지 이미 오래됐다. 세대를 거듭할 때마다 유년기의 질문은 신선한 감각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왔으며, 세대를 거듭하면서 유년기의 호기심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 갔다. 별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탐험의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나그네로 시작했으며 나그네로 남아 있다. 인류는 우주의 해안에서 충분히 긴 시간을 꾸물대며 꿈을 키워 왔다. 이제야 비로소 별들을 향해 돛을 올릴 준비가 끝난 셈이다.

P517
코스모스는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것이다. 수축과 팽창의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바로 그렇게 진동하는 우주라면 대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전 우주가 완전히 파괴되는 최후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도 싫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도 달갑지 않다. 무한정 계속 팽창하는 우주론에 따르면 은하들은 팽창과 더불어 우주의 지평선 너머로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다가 은하수 은하의 지평선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은하마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면 홀로 남은 은하수 은하는 우주적 고독을 혼자 참아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구상에 살던 외계 은하 연구자들의 일거리가 없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별들은 차갑게 식어 모두 죽고, 물질은 모조리 소립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결국 소립자들만이 흐릿하게 분포하는 아주 재미없고 적막한 세상이 도래한다. 이것이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가 맞이할 최후의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동 우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진동 우주에서 코스모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멸의 중간에 자리할 뿐이다. 한 주기가 끝나고 다음 주기로 넘어갈 때, 앞의 코스모스에서 다음 코스모스로 어떠한 정보도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 전생 우주에 있던 은하, 별, 행성 생물 그리고 문명이 후생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하고 모두 사라지고 만다. 영원무궁의 팽창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Big Bang (우주 대폭발)을 통해 우주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는 팽창과 수축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인지하기 어려운 긴 시간 동안에 진행되는 우주의 진동이지만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우주의 위대함은 인간에게 지울 숭 없는 무기력함을 선사한다.

우주의 중심은 어디인가? 우주에 경계가 있는가? 있다면 그 경계 바깥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우주의 중심이 밝혀지고, 우주의 경계, 그 경계의 바깥 우주까지 알 수 있게 되는 어떤 그럴듯한 가설이라도 세워진다면 우린 영화 [INTERSTELLA] 이후 [INTERCOSMOS] 라는 영화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아직 그런 상상력까지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우주 안에 우리의 모습이다.
약 137억 년의 우주를 700 페이지 한 권에 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를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우주의 넓음이, 우리 인간 존재의 미약함만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단순한 과학 책은 아니었다. 인문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과학 모두를 접할 수 있는 교양서라 생각한다. 완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형용하기 어려운 성취감을 느꼈다.
먼 훗날 우주가 수축하기 전 우리는 저 멀리 어느 별에서 우리와 비슷한 새로운 생명체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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