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T History: 지폐의 등장, 화폐가 신뢰의 징표인 이유

in #coinkorea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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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옷감을 통한 거래가 금속에서 동전으로 바뀌는 화폐의 발달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단, 이 편리함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언급되었던 중국 신나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 편리하고 다양해 보이는 화폐일지라도 신뢰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전에 신뢰를 형성했던 화폐를 사용합니다. 중앙정부가 아무리 구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신화폐 사용을 장려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죠.

지금부터 소개해드릴 지폐도 이러한 편리성과 신뢰 사이의 무수한 충돌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정착하게 됩니다.

기록을 통해 공식적으로 지폐가 처음 나오는 시기는 중국 당나라 때입니다.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의 지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격의 지폐는 아니었고 일종의 어음역할을 했습니다. 공책을 하나에 천 원 주고 바로 구매하는 형식이 아니라, 비전이라는 종이증서 안에 한 권의 공책을 보증하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동전에 비해 훨씬 가볍고 편리했기 때문에 잘만하면 주조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의 비전은 아직 낮은 범용성과 신뢰성으로 인해 그렇게 널리 쓰이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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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로 지폐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평가받는 송나라의 교자

무엇보다 비전은 지폐라기보다는 어음하고 다를 바 없어서 보다 오늘날의 지폐다운 화폐가 필요했는데, 이 역할은 당나라의 뒤를 이은 송나라가 하게 됩니다. 송나라대의 중국은 강남지역의 개발, 관료제 기반의 행정체제 완비, 이앙법의 도입 등으로 생활수준이 크게 개선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요. 이때의 경제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같은 시기 전유럽을 합친 인구보다 송나라의 인구가 훨씬 많았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며(물론 이 시기의 유럽은 중세 암흑기라는 것을 감안해야하기는 합니다), 송나라의 한참 뒤에 세워진 명나라에 이르기 전까지 중국이 송대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이 화폐를 발행한 이유도 처음에 동전으로 화폐유통을 했더니 넘치는 상품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고 합니다.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너무 높은 나머지 동전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결국 중국에서 지폐는 구매력의 한계를 보완하고 보다 편리하게 거래하기 위해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 지폐는 송나라에서 ‘교자’라고 불리었으며, 아직 현대의 지폐에 비하면 그 역할이 미약하기는 했지만 당나라의 비전에 비해 제 몫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반면 송나라의 뒤를 이은 나라는 송나라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던 원나라였습니다. 송나라는 당나라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문치주의를 기반으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당나라의 모순은 지방세력(절도사)에게 힘이 쏠리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기에 접어들자, 이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요. 송나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지역에 중앙의 관료를 직접 파견하는 방식으로 지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힘을 영구적으로 봉인하기 위해 나라의 기반을 문치주의로 다져나갑니다. 그러다 보니 송나라는 경제와 문화가 융성해지는 대신 국방력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북방민족을 자국의 군사력으로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오히려 공물을 바치는 형식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기형적 방식을 낳게 됩니다. 물론 경제력이 뒷받침되다 보니 중앙에서 특출난 인재가 나오면 위기의 순간을 잘 넘기고는 했지만, 이마저도 역사상 가장 광활한 나라를 세웠던 몽골제국 앞에서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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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교초

역사상 최고의 무력을 자랑했던 몽골제국은 송나라를 멸망시킬 무렵에는 이미 칭기즈칸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몇몇 나라로 찢어지게 되는데요. 중국에서는 쿠빌라이라는 사람이 원나라를 세워 통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송나라의 사례를 본받아 교초라는 지폐를 발행합니다. 하지만 원나라 후기로 가면 적자를 메꾸기 위해 교초가 너무 무분별하게 발행된 탓에 현대의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는 현대처럼 경제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플레이션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교초로 인한 경제적 혼란은 원나라에게 여러 정치적 문제와 함께 국가의 급격한 쇠퇴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원나라는 통치의 시작부터가 극소수의 몽골인과 다수의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포용하기보다는 주로 적대하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특히 저항이 극렬하여 점령하는데 40여 년 동안이나 애를 먹었던 남송지역의 무수한 백성들에게는 가장 낮은 신분을 부여하면서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시행했죠. 결국 이렇게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원나라는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었던 것이 무색하게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왕조를 바로 명나라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명나라대에서는 지폐가 활발히 유통되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지폐가 신뢰만 얻는다면 훨씬 편한 거래수단이 되기 때문에 명나라 시기에도 지폐를 유통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이미 원나라 시절에 지폐에 대한 불신을 심하게 겪어서 다시 그에 대한 신뢰를 얻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지폐 대신 자신들이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은을 통해 은본위제를 바탕으로 한 주조화폐 경제를 활성화했습니다. 아무리 편리하더라도 기본적인 신뢰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전 화폐를 사용하는 게 낫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중국보다는 한 발자국 늦게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지폐경제를 구축한 지역이 있었으니, 그 지역이 바로 중동이었습니다. 중동은 특이하게도 어음 그 자체를 이용해서 지폐경제를 구축했습니다. 중동에서 이런 식으로 지폐가 유통되었던 원인은 다름 아닌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이자가 사용될 수 없었는데, 이자를 대체할만한 수단을 강구하다가 어음을 발명하게 된 것이죠. 예컨대 어음을 주고 받을 때 거기에 수수료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어음교환이 이자를 대신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자개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데 대놓고 이자를 도입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니,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는 이 어음이 구성원들 간의 신뢰 부족으로 널리 통용되지 못했지만, 중동은 종교라는 신념이 어음 네트워크를 단단히 구축하는 역할을 합니다. 혹여나 어음으로 사기를 쳐도 이슬람 구성원들은 같은 조직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그 사기꾼이 누구인지 소문나서 신뢰가 깨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강력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경제와 문화의 부흥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대두되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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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지키기 위해 이자 대신 배당금을 주는 개념인 수쿠크(Sukuk) 채권을 금융산업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중동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멸망하고 맙니다. 천재지변도 아니고, 내부다툼도 아닌 몽골제국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당시 중동의 군사력이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 몽골군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호라즘 왕조와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특히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 몽골군에 의해 행해졌던 수많은 장부와 도서의 방화는 중동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동의 구심점이 되는 큼지막한 나라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어음화폐 네트워크도 더 이상 원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한정된 지역과 인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몽골군이 이들의 핵심부위를 무너뜨리면서 시스템을 마비시켰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몽골제국의 등장은 당시 지폐경제를 주도했던 중국과 중동 모두에게 큰 부정적 전환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반면 유럽에게 있어서 몽골제국의 등장은 비교적으로 긍정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줍니다. 그 원인에는 몽골이 동유럽으로 진격 도중 대칸(몽골의 최고 우두머리)이 사망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진군을 자제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동에 비해 유럽은 약탈을 해도 먹을 것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몽골의 직접적인 피해를 하나도 받지 않은 서유럽은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있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는데요. 이 전쟁으로 서유럽은 중동과 아시아의 선진시스템과 여러 발명품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서유럽은 중동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이자를 도입할 수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동과는 다른 그들만의 답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중세 서양화폐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오늘의 KEEP!T이었습니다.

SH

킵잇 화폐의 역사 시리즈
KEEP!T History: 태초의 화폐는 이미 암호화폐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KEEP!T History:주조화폐의 등장을 통해 보는 화폐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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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하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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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신뢰성을 보증하기위해서는 발행주체와 위변조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이런점에서 금과 은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물론 주조 비율을 조작한다거나 크기를 조작한다는 가능성은 있지만요)

그런점에서 크립토 자산에 대한 신뢰성은 두가지 모두 경쟁력이 있는 기술인듯 합니다. 이밖에도 채굴알고리즘이나 해킹 같은 요인만 해결되면 상용화에 진전이 될것 같습니다.

지폐도 실생활에 정착되기까지 1000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는데 고작 10년남짓한 비트코인은 아직 갈길이 멀어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공부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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