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T History:주조화폐의 등장을 통해 보는 화폐의 특성

in #coinkorea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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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나 원단을 통해 거래가 되었던 상품화폐는 수시로 거래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했기 때문에 결국 금속화폐로의 이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속화폐는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요? 최초의 금속화폐는 칭량화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어떤 표식을 새겨넣지 않은 금속 그 자체의 화폐를 칭량화폐라 하는데요. 지난화에서 언급이 되었던 중국의 명도전이 이 칭량화폐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칭량화폐는 금속을 잘라서 만든 화폐였기 때문에 기존의 상품화폐에 비해 편리성이 훨씬 증대되기는 했으나, 그 자체로는 신뢰성이 부족해서 거래를 할 때마다 무게를 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인류는 이와 같은 단점을 극복하고 거래과정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금속화폐를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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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짜리 동전에는 한국은행의 보증이 들어가 있으며, 다른 면에는 그 동전이 백 원짜리라는 것을 상징해주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화폐가 바로 주조화폐였습니다. 주조화폐는 단순한 금속에 지나지 않았던 칭량화폐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해당 금속에 표식을 새겨넣음으로써 신뢰성을 확보합니다. 물론 아무 단체에서 아무 표식을 새겨넣으면 신뢰성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장 다수의 지지를 받는 단체의 표식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고대 주조화폐의 시대에서 이 역할은 지금도 그러하듯 국가가 담당하게 됩니다. 현대의 주조화폐에 해당하는 동전도 특정 금액을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그 가치를 보증하는 국가의 표식이 새겨져 있죠. 주조화폐가 처음 등장했던 고대에서도 다소 투박하기는 했지만 이와 유사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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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때 처음 나왔던 반량전(좌), 한나라때 쓰였던 오수전(우)

중국 주조화폐의 경우 진나라 때 처음 나온 반량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반량전은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지의 배경이 되는 초한쟁패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하여 세운 나라인 한나라 시대 때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한나라의 초대황제로 군림했던 유방은 세금제도에 철, 소금과 더불어 반량전을 활용함으로써 주조화폐 활용성의 증진을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자 새로운 화폐인 오수전을 도입합니다. 오수전은 고대중국의 무게단위인 수(銖)에서 유래된 주조화폐였습니다. 5수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오수전이라 명명된 것입니다.

오수전은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서자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나라의 초대황제였던 왕망은 한나라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오수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나라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런데 이 화폐개혁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기이했기 때문에 국가경제에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정책 중에는 금, 은, 거북이 껍질, 조개 껍질, 구리로 만든 28가지 종류의 동전을 주조한 정책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화폐가 발행되다보니 백성들이 어떤 화폐를 신뢰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급기야 민간에서는 신나라가 주조한 화폐를 쓰지 않고, 계속해서 한나라의 화폐였던 오수전을 몰래 쓰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 혼란한 틈을 타서 주조차익을 노리는 위조화폐업자들도 성행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관련 행위자들을 모두 엄벌에 처했으나, 워낙 체제가 불안정하다보니 이러한 행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화폐개혁을 다시 옛날식으로 수차례 단행하였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조치는 무의미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신나라는 초대황제의 대에서 유씨 가문에게 다시 옥좌를 넘기면서 멸망하게 되고 후한이 새로 들어서게 됩니다. 구성원들의 합의 없이 한 독단적인 세력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해당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후한은 신나라의 독단적인 국가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들어선 나라였기 때문에 고대왕조치고는 제법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게 되는데요. 국유화했던 철과 소금을 다시 민영화하고, 각종 자본세와 거래세를 폐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한나라 시대 전반에 걸쳐 금속화폐의 금속함량에 따른 경제상황의 변화도 주목할만한 점입니다. 대체적으로 국가가 성립된 뒤 화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요. 주조화폐 시대에서는 금속함량을 점점 낮추는 식으로 화폐의 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지게 됩니다. 굳이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면서까지 금속함량을 줄였던 이유는 국가의 보증이라는 방패를 앞세워서 해당가치 이하의 금속함량을 주조하면, 그만큼의 차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이용하여 민간위조화폐 기술자들은 주조차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화폐를 만들어내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국가관료가 이 점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용도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로 유명한 그레샴의 법칙입니다. 중국 한나라 시절에도 화폐의 액면가와 실제가를 다르게 적용하여 전한말기~신나라 시기에 큰 혼란이 있었으나, 후한에 이르러 반량전의 액면가와 실제가를 3.33g으로 통일하여 화폐질서를 안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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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습이 새겨진 주조화폐

한편 고대 서양의 대표적 제국인 로마제국도 주조화폐로 매우 유명한 나라 중 하나였는데요. 로마는 중국에 비해 금속 채굴량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금속화폐의 보편화가 더 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같은 시기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금 채굴량만 비교해봐도 10배가 넘게 차이난다는 자료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로마가 금속채굴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정복지에서 발견한 광산이 엄청난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유가 컸습니다.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 히스패니아 지방(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잇따라 큰 광산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요. 이렇게 채굴량이 많으면 주조차익을 할 상황이 적었을 것 같지만, 로마 후기로 내려올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심해져만 갔습니다. 특히 로마제국 전체의 역사에서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기간에는 로마 은화의 함유량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에는 은 채굴량의 감소라는 표면적 이유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었는데요. 우선 제국의 통치와 치안을 위해 로마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군인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군인의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또한 이들의 봉급이 제때 지급되지 않았던 이유에도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중동의 제국이 파르티아에서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강력한 나라로 바뀌었고, 게르만 민족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졌기 때문에 군사의 숫자가 필연적으로 증강되어야 했습니다. 이는 증강된 병사숫자만큼의 봉급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로 세금제도의 불균형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군대를 다녀오고 세금의 의무를 지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는데, 여기서 이 원칙을 위배하는 계층은 소수의 지배계층과 노예계층이었습니다. 지배계층은 사회적 지위로 인한 특권으로 면세대상이 되었던 것이고, 노예계층은 나라 안의 온갖 생산을 담당하면서도 노예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수취대상에서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재정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노예계층에게 세금을 부여하는 순간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야 했음으로, 이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장기적으로 만연화된다면 경제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군인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기축통화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3세기 이후 많은 황제들이 반란에 의한 암살로 인해 통치를 얼마 하지 못하고 죽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기축통화의 혼란으로 독자적인 화폐가 발행되는 시도도 일어나게 됩니다. 중앙에서는 이 혼란을 막기 위해 경제적인 조치로 실질적인 은 함유량을 낮추고 액면 은 함유량은 올리는 극단적 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화폐발행량을 대폭 늘려나갔지만, 이러한 해결방법은 마약으로 고통을 잠시 잊는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금을 걷는 것이 한계에 봉착하자 수취대상인 자유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노예를 제도적으로 없애는 카라칼라 칙령을 선포하지만, 재정의 문란과 같은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큰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약의 취기에서 정신을 차린 순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민족에 의한 본토 유린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주요 문명국의 주조화폐 역사를 통해 우리는 여러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칭량화폐와 비교했을 때 액면가만큼의 실질가치를 인정해준다는 ‘국가의 보증’이 있어서 거래과정이 획기적으로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그 실체에는 여전히 국가보증의 탈을 쓰고 주조차익을 노리는 세력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그 체제를 스스로 만든 국가의 관료들이었고 이외에 이러한 차익을 집요하게 노리는, 다시 말해서 오늘날 일부 투자자들의 조상격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칭량화폐에 비해서는 편리하긴 했으나, 여전히 주조화폐도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가볍고, 빠르면서도 한 번 거래를 하면 그 가치에 대한 신뢰성이 훼손되지 않는 무언가가 발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세의 오랜 암흑기를 버텨내고 만들어진 화폐가 바로 지폐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지폐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오늘의 KEEP!T이었습니다.

SH

참고자료
에드워드 기번 저, 송은주 역, 민음사, 로마제국 쇠망사
Comparison between Roman and Han Empires

킵잇 화폐의 역사 시리즈
KEEP!T History: 태초의 화폐는 이미 암호화폐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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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다음엔 코인 이겠죠 ㅎ ㅎ

이렇게 화폐의 역사를 보니 뭔가 미래를 대비해서 공부하는 기분이네요 ㅎ

주조차익 하니까 화폐와금융 수업 시간에 배운 '시뇨리지' 가 떠오르네요! 시험에 나올까봐 스팰링을 열심히 외웠었는데...ㅋㅋ!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keepit님이 쓰신 '일본 여행기'를 보고 스팀잇까지 찾아왔습니다.

저도 지금 [비트코인만으로 해외여행 가기]를 도전중인 대학생인데 keepit님의 글을 보고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여행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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