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T History: 흥선대원군과 암호화폐 이야기

in #coinkorea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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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KEEP!T입니다. 오늘은 화폐의 역사 마지막 편 KEEP!T History: 돈의 진화, Programmable 화폐의 등장에 덧붙여 부록형식으로 예전 콘텐츠들을 조금 수정하여 올려보려고 합니다. 바로 작년에 올렸던 흥선대원군 시리즈와 존 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먼저 수정된 흥선대원군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KEEP!T History

땡전 한 푼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던 말일 것입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일 때 종종 읊조리곤 하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땡전’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은 계신가요?

땡전의 씨앗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왕권강화의 뜻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칩니다. 문제는 역사에서 대규모 건축공사가 늘 그랬듯,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초기에 이 문제를 원납전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원납전은 매관매직(조정에서 벼슬을 팔아 돈을 받는 행위)이나 포상을 통해 백성들의 기부를 반강제적으로 유도하는 기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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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옛모습

이를 통해 조정은 원납전 실시 첫 해에 500만 냥에 달하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표준화폐였던 상평통보의 유통총액이 대략 1000만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액수가 모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초기 1년은 경복궁 중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공사작업에 동원되는 백성들에게 적당한 임금이 지급되고 작업강도 또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열악하지 않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원납전의 성격이 비록 반강제적인 기부금이었으나 비교적 안정적으로 모인 자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비자발적인 금모으기 운동이 나라의 위기에 쓰인 게 아니라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이 2년차인 1866년으로 넘어가자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대내적으로는 잘 진행되던 경복궁 중건 현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작업했던 성과들이 상당부분 초기화되었으며 근처에 쌓아두었던 목재마저 잃게 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백전의 발행을 수락하게 됩니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국용(國用)을 통제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방금 변란을 겪고 공비(公費)가 날로 늘어 나라의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곤란하기가 지금 같은 때가 없는 만큼 마땅히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힘을 펴는 방책부터 강구해야 하지만 지금 경제가 궁핍하여 밤낮 근심스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당백전을 주조하자고 한 좌의정(左議政)의 계(啓)는 실로 옛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형편을 참작한 훌륭한 계책입니다. 다만 유포시켜 통행시키는 것은 비록 유사(有司)에 조처하는 책임이 있으나, 지출과 수입을 따지고 비용을 절약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제때에 크게 변통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역(易)》에서 이른바 재정을 다스리는 방책으로서 국용도 넉넉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하문(下問)하여 재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부사(判府事) 김병국(金炳國) 이하 사람들의 의견도 다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조하는 문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며 장소는 금위영(禁衛營)에서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1월 6일 신유 3번째 기사

정확히 1866년 11월 6일의 일이었죠. 그전에 유통되었던 상평통보가 사실상 한국 역사에서 화폐다운 화폐의 기능을 처음으로 유지했다면, 당백전은 한국 역사 최초의 통화정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문제는 건전하게 시행되었어야할 이 통화정책이 경제학적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해당 화폐의 가치를 고려해 통화량을 세심하게 조절했어야하는데, 그저 찍어내서 유통만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 이상의 부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옵니다. 명목가치는 100배에 달했던데 비해 실질적인 생산원가는 다른 화폐의 5~6배에 불과했던 당백전은 곧장 조선경제에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화폐단위부터가 백성들이 쓰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을 뿐더러, 당백전의 가치괴리를 다들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래를 꺼리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백전 거래는 전부 거부하고 상평통보 및 현물은 지키려는 현상으로 인해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다시 성행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또한 조정의 세금수취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한 뒤 지방수령들에게 세금을 당백전으로 걷을 것을 명했지만, 지방수령들은 백성들에게 상평통보나 현물을 수취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걷은 세금은 자신들의 창고에 보관한 뒤, 그 세수(세금수입)만큼의 당백전을 조정에 납부했습니다. 악화(당백전)가 양화(상평통보, 현물)를 구축하는 사태가 그대로 실현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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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측이 당백전, 우측이 상평통보의 모습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조선조정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차익에서 오는 시뇨리지(주조차익)효과를 채 반년도 보지 못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됩니다. 쌀값은 반년 만에 8배 가까이 폭등을 하였으며, 그 사이 1600만 냥에 달하는 당백전이 풀려 화폐의 가치가 바닥을 치게 됩니다. 앞서 말했던 상평통보의 유통총액이 1000만 냥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임이 자명해보였습니다. 당백전이 땅돈이라 불리며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상황을 수습하고자 2년 만에 1600만 냥 어치의 당백전을 전량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고 회수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기가 막힌 건 회수과정에서의 교환비가 1:1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당백전 1개를 들고 가면 조정에서는 상평통보 1개로 답례를 해주었습니다. 당백전을 들고 있었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명목자산가치가 1/100로 떨어진 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백전을 없앤다고 해서 이미 유발된 고인플레이션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완충화폐 없이 상평통보가 풀리면 그동안의 거품이 한 번에 드러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조정에서 당백전의 대체화폐로 내놓은 것이 바로 상평통보의 1/3가치였던 청나라의 화폐 청전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달러를 국내의 민간시장에서 원화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치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청전마저도 상평통보에 비해 악화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경제의 혼란은 지속되었고, 악화가 계속해서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상평통보의 가치는 계속 올라서 이를 쌓아두는 관료만 이득을 취하고 청전을 사용하는 일반백성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죠.

결국 근본적으로 화폐경제를 되살리려면 양화를 제외한 악화를 폐지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전은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얼마 뒤에 폐지되고 맙니다. 물론 결정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조선후기의 세수가 60만 냥 정도에 달했는데 당백전만 1600만 냥이 풀렸으니, 이제는 그 차액만큼의 부담을 조정이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보려 해도 이미 시장경제가 파탄이 난 상황이라 제대로 세금수취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에게 쌀조차 제때 지급을 못하는 바람에 결국 임오군란과 같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죠.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는 임오군란이 매우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그 경제적 배경에는 이처럼 복잡한 과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임오군란이 한국근대사에서 조선멸망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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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현대판 당백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짐바브웨의 화폐 짐바브웨 달러입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당백전 사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그 물가상승률이 당백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습니다. 2008년 여름경에는 상승률이 1000억%에 다다를 정도로 말입니다. 이후 2008년 겨울쯤에는 억이나 조 단위를 넘어 상승률이 경, 해에 이를 지경이라 정확한 계산이 나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치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짐바브웨의 경제적 후유증이 어떻게 남아있을지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겠죠.

이밖에도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부정부패와 경제정책 남용으로 화폐질서가 무너진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우 짐바브웨의 뒤를 쫓아 가파른 인플레이션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망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2019년 인플레이션율은 1000 만%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선진국에서조차 현대 금융자본주의가 가지는 근본적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양적완화를 해도 돈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구성원 대다수의 실질소득이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국면에서 암호화폐의 등장은 중앙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카모토 사토시가 2008년 금융위기의 1달 뒤쯤 비트코인 백서를 처음 공개한 이래로, 비트코인이 중앙화폐의 부작용이 생긴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이 그 대표적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암호화폐의 미숙한 탈중앙화 시스템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더라도, 암호화폐는 중앙이 관리하기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여러 문제들에 경종을 울려주는 기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입니다. 암호화폐의 미래가 중앙과 결합하는 구조로 갈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대가 디지털 시대를 추구할수록 중앙시스템도 기존의 시스템을 그대로 고수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세계경제가 조선말기의 당백전처럼 잘못된 유인책을 선택하지 않기를 기대해봅니다. 다음화에서는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정치적인 측면에서 흥선대운과 암호화폐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만약 여러분이 건물을 세 들어 살고 있는데 건물주가 내야할 세금을 여러분에게 대신 내라 그러면 어떤가요? 또 군대를 안 가게 되어서 병역세를 내라하는데, 내 몫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몫까지 대신 부과하라 그러면 어떤가요? 여기에 저소득을 위한 저리의 특별대출이 있다며 국가가 강제로 대출을 진행하면 어떨까요.

실제로 위와 같은 일이 조선말에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일컬어지던 이 폐단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죠. 지주가 내야할 세금이 소작농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첫 번째 문란 전정田政), 병역세로 1년에 1필 내던 군포를 탐관오리가 덤터기 씌우는 현상이 일반적인 일(두 번째 문란 군정軍政)이 되어버렸습니다. 탐관오리들은 자신들의 몫을 전가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몫까지 군포를 받아 내거나, 갓난아기와 노인에게까지 징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춘궁기에 쌀을 빌려주었다가 추수철에 되갚는 환곡제도를 강제로 적용하여 기득권이 이자놀이를 즐기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세 번째 문란 환곡還穀)

그리고 이 폐단의 꼭대기에는 세도정치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정조가 세상을 뜬 이후로 정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외척이 왕의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습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로 대표되는 이들의 권력남용이 그대로 지방정부에게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시기에는 이런 대내적 문제와 더불어 외세의 국권침탈이라는 대외적 문제까지 해결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부터 강력한 개혁의지를 드러내며 그동안의 폐단을 대수술하는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가장 큰 문제였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습니다. 올바른 토지조사와 함께 숨겨진 토지를 색출하여 전정 문제를 개혁하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군포를 사람기준이 아닌 집의 기준으로 걷게끔 하였습니다. 또 환곡문제 역시 지방의 수령이 아닌 마을의 명망 있는 양반이 실시하도록 해서 신뢰도를 향상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가장 큰 불을 끈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타파하기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나갑니다. 세도가문의 핵심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양반들의 경제적 근간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으로 정리했던 것이죠. 특히 서원철폐는 오늘날로 따지면 부동산 문제에 비견될 정도로 기득권의 모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분류되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내적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나가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바로 열강의 그림자가 조선에까지 드리웠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여기서 모두가 아는 것처럼 쇄국정책으로 문호개방의 통로를 차단합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고집불통인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맥락에서 보면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이 있을 수 있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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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홍성군 척화비
image from: http://www.doopedia.co.kr/mo/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2&MAS_IDX=101013000767510

먼저 흥선대원군측은 처음부터 열강들을 폐쇄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양선(열강의 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오히려 조정은 그들에게 식량을 보내주는 등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터졌던 열강의 공격과 약탈로 인해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것이죠. 특히 오페르트라는 독일의 상인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조정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열강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거기다 쇄국정책을 펼쳤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모든 통로를 막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배였던 제너럴셔먼호를 바탕으로 외국의 설계도를 참고해서 증기선을 직접 만들어보려고 시도했으며,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신식무기와 제도의 도입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단지 1860~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 선진문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아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의 쇄국정책을 마냥 이해만 해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슷한 시기 아시아에서 독립을 지켜낸 두 나라, 일본과 태국을 보면 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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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의 뿌리라 불리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위), 태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 불리는 라마 5세(아래) 자국에서 이들은 최고의 위기 속에서 국가를 구한 위인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경우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신진인사들이 존황양이(왕을 높이고 서양을 배척한다)라는 명분아래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왕정복고에 성공하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서양을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막부를 타도했지만, 새로운 통치체제를 들이는 과정에서 서구열강의 힘을 경험하자마자 개항으로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는 점입니다. 이때가 바로 1868년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에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터졌으며,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습격)가 일어났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조선조정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여론의 반대를 무릅써서라도 열강과 채널을 확보했다면, 불과 8년 뒤 일본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이후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례는 조선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정치, 사회적 상황이 상이했기 때문에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도 독립에 성공한 태국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국의 당시 국왕은 라마 5세였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교묘하게 대치시키는 대나무 외교를 펼치면서 독립을 지켜내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속국이었던 오늘날의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열강에게 떼어주는 손해를 감수하게 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태국은 동남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이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일본처럼 근대화가 불가능한 처지였다면, 강제개항 이후 태국처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조선은 한 박자 느렸고,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고종이 전권을 잡았을 때도 결정적 기회를 몇 번 놓치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고 맙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말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둘 다 변화의 시점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되돌아봐야할 점이 있습니다. 특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전략을 구사해야하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죠. 그럼 격변의 19세기 조선을 통해 우리가 비추어봐야 할 현재의 거울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한 박자 빠른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이 무너지고 있을 때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국가들의 공통점에는 신속한 개혁조치가 있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는데 불과 8년만인 1876년에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만큼 강성해진 것만 봐도 유신인사들의 개혁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태국 역시 대나무 외교의 뒤에는 신속한 근대화 조치가 숨어있었습니다.

물론 조선이 두 나라와는 달리 서양문물에 관련한 인재나 인프라가 전혀 없었고, 외세에게 호의를 베풀어줬더니 오히려 공격을 받은 극한의 상황이었던 점은 참작해야합니다. 세도정치 하나 척결하는 데만 해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겠죠.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오래전부터 접했고, 태국의 라마 5세는 어릴 때부터 서양문물을 접하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내부의 악습을 개혁한 흥선대원군을 무턱대고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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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기의 시대에는 지도층이 중간만해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유신인사와 흥선대원군의 차이는 사실 거기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둘 다 서양을 배척하는 태도로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으나, 열강의 힘을 맛본 순간 유신인사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명분인 천황제만 남겨놓고 대변혁에 착수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런 상황은 오늘날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그때와 달리 오늘날에는 식민통치의 위기가 경제적 지배의 위기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정부에서도 사실 이를 두고 고민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블록체인이 미래의 기술인 건 인식하고 있지만 실물경제를 고려하면 현재의 블록체인 시장은 불안정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명확한 플랜을 갖고 있다면 한 박자 빠르게 블록체인을 육성하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실물경제와 블록체인을 둘 다 잡는 건 불가능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나라가 분명 존재합니다. 자본이 가장 발달한 나라인 미국에서도 오히려 블록체인으로 실물경제를 더 확장하기 위해 증권형 토큰 거래소를 조용히 만들어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한국이 글로벌 시장에 민감하고 인적자원에 의존하는 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다른 나라보다 좀 더 신속하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블록체인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둘째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선결조건일 뿐, 완결조건은 아닙니다. 당시 또 다른 이웃나라였던 청나라를 보면 현상의 정확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통해 일본보다 개혁을 빨리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역사가들은 그 이유를 흔히 개혁의 불완전성에서 찾습니다. 청나라의 소수인사들이 제도 전반의 개혁을 주장했음에도, 다수의 기득권이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적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죠. 당시에 그들은 그렇게 군사력과 산업만 육성해도 외세를 막아내는데 무리가 없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청일전쟁의 패배,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 왕조의 멸망이었습니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모든 가능성에 대한 눈과 귀를 열고 최선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이 지금의 정책실행자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만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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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의 당백전이 악화가 되어
양화인 사실상 최초의 한반도 화폐 상평통보를
백성들에게서 세금받는 관료들 손에 구축시키고,
막대한 인플레이션 일으키고,

문제를 인식하고 회수할 때는 1:1 비율로 회수했다니,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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