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pen] 1일차. 죽지 않으려고 걸었다

in #camino6 years ago (edited)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나는 지금 눈물에, 콧물에, 침까지 흘려가며 버티고 있다. 나를 어떻게든 이 산에서 돌려 보내려는 피레네의 바람을.

잠에서 깬 것은 5시 반의 시커먼 새벽이었다. 윗층 침대의 아저씨는 침대를 무너 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코를 골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던 것인지 자면서 듣기로는 마치 중후한 콘트라베이스 소리 같았는데... 일어나서 보니 정말 콘트라베이스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1층 응접실에서 잉글랜드에서 오신 해리 아저씨와 친절한 스페인 사람 아이톤을 만났다. 선반 위에 놓인 빵조각을 아침으로 먹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왜 이 길을 걸으려고 하느냐 하는 질문이 오고 갔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아이톤이 그런다. I guess we all are here to find something (내 생각에 우린 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 곳에 온 것 같아). 그리고 내게 묻는다. 너가 찾는 건 뭐야? 장난처럼 대답했다. 내가 이 길을 걷는 이유.

성난 소리를 내며 무시무시하게 부는 바람을 가로 지르며 까미노를 향한 나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무엇을 겁내야할 지도 모른 채. 두 발아 잘 부탁해.

첫 날인 오늘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까지 27.1 km를 걸을 것이다. 밤길처럼 어두운 새벽길에 혼자인데도 아무 걱정없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걷는다. 따뜻한 바람만이 파도소리를 내며 나를 에워싼다. 어쩐지 다른 순례자들을 통 볼 수 없다. 이 길을 나 혼자 걷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쫓아갈 사람도 없지만, 쫓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다행이다.

그 다행스러움이 걱정스러움으로 변할 때 쯤 씨마스를 만났다. 1미터 90 은 되어보이는 장신의 백인 남자는 내 가방의 3배는 커 보이는 배낭을 메고 힘든 기색없이 오르막을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었다. 막 입대한 군인같아 보였다.

Hey 하면서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름과 국적을 교환했다. Lithuania 에서 왔다고 하는데 응?? 못알아듣기를 반복, 그냥... 유럽 어디에서 왔어. 체념한 듯 멋쩍게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헤어졌다. 아쉬울 것도 없다. 그의 걸음걸이가 나보다 빨랐으니까. 씨마스는 나의 까미노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된다.

숨이 턱턱 막히는 오르막이 끝나고 피레네 산맥의 넓은 정상이 펼쳐지는데, 나를 앞지른 순례자들이 저 멀리 다 보인다. 한참을 앞선 줄 알았더니? 그들이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레네의 풍경은 시시각각으로, 아니 초 단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구름이 하늘을 이불처럼 뒤 덮어 사방을 어둡게 만들더니 엄청난 속도의 바람에 걷혀지기를 일쑤였다. 무지개는 쉬지 않고 떠 있고, 당장 이 산을 내려가라 는 듯한 바람 소리가 온 산과 내 귓가에 포효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앞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태어나서 그런 강풍은 처음이었다.

죽지 않으려고 걸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바람에 내동냉이 쳐져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아서. 이 엄청난 맞바람을 뚫고 지나가려니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흘리고 있다. 내가 지금 무슨 벌칙을 당하고 있는 거지? 더는 걷고 싶지 않다. 걸을 수가 없잖아. 미운 바람 앞에 몇 번이나 지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대체 왜, 이 미치도록 무서운 바람을 감당하면서까지 이 길을 걸어야 하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만큼이나 내가 열심히 한 것은, 바로 다른 순례자들을 살피는 일이었다. 다들 괜찮은지 걱정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림잡아 스무명 쯤 되어 보이는 이들 하나같이, 비행기라도 끌고 가는 모양으로 겨우 서서는 단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모자와 머플러가 날아가 버리는 사람,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 애먼 스틱이라도 뻗어 보려는 사람....

이 시련을 나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원망섞인 설움은 가라앉는다. 다같이 애쓰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 것도 잠깐, 그래도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 체중이 많이 나가거나 배낭이 무거운 사람은, 나보다 쉽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다른 날에 왔더라면 나도 남들처럼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며 유유히 걸을 수 있었을텐데....... 억울하다니. 이 오르막도, 이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바람도 나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나의 포기를 합리화시키고,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 던 것이다.

쉬고 싶어 가벼운 발걸음은 더더욱 힘없이 쓸려 나갔고, 잠시 방심한 사이에 중심을 잃었다.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 순간적으로 산양떼가 머물고 있는 잔디밭에 풀썩 몸을 눕혔다. 사방이 똥이다. 똥밭에 주저 앉은 마당에 가방에서 오렌지를 꺼내 먹었다. 바람이 그나마 잦아진 후 다시 힘차게,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바람이 약해진 틈을 타 모두 서둘러 걸었다. 강풍이 부는 두 시간 동안 500미터도 채 걷지 못했다(보통은 1시간에 4~5km 를 걷는다). 또 다시 강풍이 오면 이 산을 내려가지 못할 수도 있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숲에서, 바람과의 사투를 끝낸 순례자들이 모여 앉아서 물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살았구나..... 눈물이라도 날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 아침에 숙소에서 본 잉글랜드 아저씨가 보여 Harry! 하고 반갑게 외치며 손을 마구 흔들었는데, 해리는 사뭇 당황한 눈치로 어색하게 내 인사를 받는다. 몇 시에 출발했느냐, 바람 때문에 고생했다 등등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이 계속 걷게 되었다. 해리는 해리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더그, 은퇴 후 여행을 하고 있는 캐나다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 아까는 네가 무안할까봐 해리인 척 했어.

산티아고 가는 길이지만, 산티아고가 목적은 아니라는 더그. 단지 길을 걷고, 보고 느끼며 즐기고 싶은 것이라면서, 자신은 순례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유쾌한 젊은 할아버지의 느낌이다. 나이는 묻지는 않았지만 은퇴를 했고 손주가 있다는 이야기에 대강 연배를 짐작하고 있다가는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에 나이 생각은 다 관두었다.

하산 중에 저 멀리 우리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가 보인다. 수도원을 개조해서 만든 론세스바예스의 유일한 공립 알베르게는 순례길을 시작한 모든 이들이 쉬어가는 곳인 만큼 규모가 컸다. 새벽 6시도 되지 않아 출발했으니 분명히 선두로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방향에서 순례자들이 떼를 지어 오고 있었다. 물어보니 나보다 한참은 늦게 출발한 사람들이다.

그 길은 막혀서 우린 다른 길로 왔어.

오늘 아침 태풍 주의보가 내려 피레네 산맥 입산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내가 이미 산으로 들어간 후였다. 어쩐지...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날 따라잡지 않더라니. 소수의 일찍 출발한 사람들만이 바람과 외로운 사투를 벌인 것이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침대로 와서 짐을 풀고, 더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프랑스였는데, 지금은 스페인에 있다. 스페인 국경을 언제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도 몇장 못찍었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환청이 들린다. 우리를 집어 삼킬 듯이 위협하며 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정말이지 멈출 수가 없어서 걸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걷는 것이다. 순례길에서 진리나 깨달음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800km 를 끝까지 걷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진 그렇다.

2015.9.16 길 위에서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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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Cheer Up! 많은 사람들이 이 포스팅에 관심을 갖고 있나봐요!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제목에서부터 그 힘든 여정이 느껴지는군요.
앞으로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오늘도 마음 편안한 하루 되시길 바랄게요.

첫날이 가장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앞으로의 여정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질 듯 합니다 :-) 팁투요님(이렇게 불러드려도 되는지요?)도 편안한 하루 되셨기를 바랍니다 :-)

와우.. 산티아고순례길.. 부럽네요 ㅡㅜ 제 죽기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방문 장소입니다.. 한번 꼭 가보고싶은데 사진으로 미리 보니 너무 좋네요 ㅋㅋ

@realgr 님 안녕하세요 :-) 죽기 전에 꼭 가보실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

springfilled 의 까미노기행을 다 본 후에 산티아고를 갈지 말지 결정하려는 마음으로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첫날 부터 바람으로 고생하셨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봤네요.. 다들 어둠, 추위,산길, 물집, 무릅 그런게 문제가되던데...바람이 강하면 ...눈물나죠...건투를 빕니다.
그나저나 해리같은 젊은 할아버지, 얼마전 애인과 헤어졌다니 ..신선하네요.

springfilled 님 혹시 그림그리세요?
세 번째 밤하늘 사진이 갑자기 저를 확 당기는데....
그림 소재로 사용하실 건지 여쭙습니다.

저의 책임이 막중하군요 'ㅁ' 순례길도 여러갈래가 있고, 같은 길을 다녀왔어도 순례자의 수만큼이나 다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raah 님은 @raah 님만의 길을 걷게 되실 거랍니다. 보통 저리 태풍이 불면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강풍경험을 하신 분은 다행히 별로 없으셔요. 저는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ㅁ; 첫날부터 영혼이 반쯤 나가는 경험이었습니다.

세번째 사진 저도 사심으로 올렸어요. 그림을 못그리니 사진이라도 이렇게 찍는 거랍니다. 저기 하얀 점처럼 찍힌 건 먼지가 아니라 별이예요 ;ㅁ; @raah 님의 물감을 입으면 어떻게 변할 지 궁금합니다! :-)

시작부터 엄청 고생하셨네요ㅠㅠ 산에서 태풍을 만나시다니...이건 앞으로 평온한 여행을 위한 액땜이었을까요?
알아보니 생각보다 피레네 산맥을 넘다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ㅠ

헉!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군요 ;ㅁ; 저희도 도착해서 피레네로 출발한 사람들 중에 실족사한 사람들 없는지 서로 물어보았답니다. 천재님 말씀대로 첫날 저런 시련을 겪었다니 그 뒤로는 수월하더군요 ㅎㅎㅎㅎ

언젠가 가야지 하면서 읽었네요.

앗! @kingbit 님 안녕하세요! 그 언젠가가 참 좋은 날, 멋진날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바람이 엄청 부나봐요^^;;

@seungmi 님 안녕하세요! 바람이 원래 저렇게 불면... 저길 올라가면 안되는 거였대요 ㅠㅠ 순례길에서 바람으로 고생한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나이는 묻지는 않았지만 은퇴를 했고 손주가 있다는 이야기에 대강 연배를 짐작하고 있다가는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에 나이 생각은 다 관두었다.

글을 읽는 내내 생생하게 전달되는 느낌에 감탄을 하다가, 이 문장에서 @springfield 님의 내공을 느꼈네요....ㅎㅎ
오늘도 덕분에 산티아고길을 미리 걸어봤네요. 감사합니다★

@mnsun 님 안녕하세요 :-) 생생, 감탄, 내공... 전부 너무 감사한 단어들이네요. 저와 함께 걸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좋은 날, 편안한 밤 되셔요 :-)

글 진짜 잘 쓰세요.

이 시련을 나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원망섞인 설움은 가라앉는다. 다같이 애쓰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 것도 잠깐, 그래도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이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어요 ^^

@gyedo 님의 첫마디에 정말로 힘이 났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부분은... 제가 너무 찌질해보일까봐 쓸까 망설였는데 ㅎㅎㅎ 와닿았다고 해주시니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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