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길 위에서 스팀잇을 바라보다

in #busy6 years ago (edited)

최소한 30대 이하 인구 중에서는 SNS를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 편입니다. 블로그든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트위터든, SNS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저도 나모 웹에디터로 홈페이지를 직접 짜던(요즘말로 하면 '코딩'하던) 2000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SNS를 거쳤습니다. 그 중 제일 오래된 게 티스토리 블로그입니다.

티스토리 블로그 개설일자가 아마 2006년쯤인데 직접 만든 HTML 홈페이지에서 네이버 블로그, 이글루스 블로그를 거쳐 티스토리로 왔던 것 같습니다.

왜 티스토리로 왔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부터 지금까지 기록된 글이 3587편입니다.

공개된 것은 831편이니 상당수가 비공개 처리된 셈이죠.

이렇게 비공개가 많은 것은 블로그라는 공간이 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공적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루에도 수만가지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런 생각을 다 입으로 내뱉지는 않죠.

공적 공간으로서의 블로그가 블로그 주인장에게 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하는 수많은 생각 중에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이 알아서 별로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꽤나 엄격한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다소 러프한 기준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전에(혹은 쓰며) 자체 필터링을 할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좀 러프한 기준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것보단 엄격한 기준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한 3년 트레이닝 막바지에 모 대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낸 사실과 관련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친한 사람과 사석에서나 할 법한 몇마디를 별 생각없이 적었는데 그 글이 그 기업 관계자(아마도 임상심리전문가일 가능성이 높은)의 검색에 걸렸고, 이러한 사실이 건너건너 제 귀에까지 흘러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임상심리전문가가 1000~1100명 정도라 사실 이렇게 제 귀에까지 들어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죠. 마음 먹고 알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을 만큼 좁은 분야입니다.

블로그 글이 제가 입사원서를 낸 기업 관계자에게 발각됐다는 사실에 저는 마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사실 그 글은 글이라고 하기도 뭣한 대여섯 줄의 넋두리로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누굴 비방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다!'는 식의 포부를 밝힌 것이죠.

사실 별로 창피할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단지 그 기업과 내가 인연이 없구나 정도로 넘어갔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병원이라는 위계서열 뚜렷한 큰 조직 안에서 늘 긴장과 불안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수련생이라는 위치가 이런 화끈거림에 한몫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사건이 침투적 기억(intrusive memory)처럼 종종 떠오르곤 합니다. 긴장과 불안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던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자신없음'이 수치심을 유발했던 것 같아요.

트레이닝 3년을 내리 한 병원에서 일하며 다양한 정신과 환자를 평가했는데, 3년차 되어서도 심리평가 보고서 쓸 때마다 사례개념화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심리평가의 큰 틀이 지능/사고/정서 및 성격인데, 지능, 사고 영역이야 어떻게 커버가 된다 하더라도 정서 및 성격 부분을 기술하는 게 늘 고역이었습니다. 모든 보고서마다 수퍼비전을 반드시 받아야 했고 제 수퍼바이저는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매우 배울 게 많은 분이었음에도, '나는 왜 제자리 걸음인 것 같지'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환자 개개인에 맞춰서 심리평가 보고서를 쓰는 게 아니라 진단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서 쓸 때가 많았습니다. 환자의 역동이라든지 환자가 왜 지금 정신과에 왔을지에 대한 가설을 내놓는 데 자신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죠.

수련 끝나가는 마당이었고 타이틀은 곧 '임상심리전.문.가.'인데, 스스로가 별로 전문가 같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가짜 전문가 같은 느낌은 트레이닝을 마치고 아동 심리치료 현장에 뛰어들었던 1년 내내, 불행히도 더 심화됐습니다.

아동 심리치료 현장에서의 근무, 그러니까 전문가 취득 후 첫 직장을 1년만에 그만 두고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싱글이라면 어디 여행이라도 갔겠지만 처자식이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왕복 4시간쯤 걸리는 지방 소도시까지 가서 프리랜서로 일했습니다.

오고가는 열차 안에서 내린 나름의 잠정적 결론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서 환자를 더 많이 보자'였습니다.

'환자 보는 눈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더 많은 환자를 보고 더 공부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것이죠.

단순하지만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임상경험만큼 임상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게 또 뭐가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결단으로서, 심리치료 장면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심리치료자로서 준비가 안 됐다는 증거고, 그렇다면 치료는 아예 back to the basic하여 왕초보로서 다시 배우자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담일을 열심히 하고 비싼 수퍼비전 비용도 감내해 가며 수퍼비전 받으러 다니고 있는 것이죠.

비교적 경한 내담자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기회와 능력이 허락한다면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심리치료를 해보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낸시 맥윌리엄스 여사처럼 말이죠.

스팀잇에 연재되고 있는 정신장애 이야기나 상담 및 심리치료에 관한 글들은 이런 저의 궤적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심리치료자로서의 성장기인 셈이죠.

이 글 서두에 블로그에 노출되는 수위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심리치료자로서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글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제 개인적인 얘기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이 언급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스팀잇에 써 온 글만 가지고서도 제가 누군지 알아내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영구 박제되는 스팀잇의 특성으로 인해 이런 부분들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여러 스티미언님들께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하신 적이 있죠.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이나 매우 가까운 지인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환자나 내담자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관심은 당연히 예외입니다). 가족에게도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요.

다만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집요하게 접근할 때 문제가 초래될 여지가 '다소' 있다는 것이고(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한들 예전처럼 수치스럽거나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의 탈을 쓰고만 있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예전에 저를 상담해 주시던 선생님은 저를 보고 임상가가 아니라 샐러리맨 같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저는 발끈했죠. '임상가라고 해서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느냐. 그래 봤자 돈 받은 만큼 일해주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다소 '오만한'(이것도 상담 선생님의 표현입니다ㅎ) 태도로 전문가가 되기 위한 코스를 밟던 과거의 저는 저렇게 생각했었죠 확실히..

허점 투성이임을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더 나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의 저는 저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은 오히려 수련생때보다 로딩이 더 많지만 일 자체는 훨씬 잼있어졌죠.

내가 틀릴 수도,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전문가로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런 사실이 밝혀진다면 팩트 체크해서 잘못된 부분은 시인하면 그만입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게 마련인데, 당연히 잘 알지 못 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박사가 되면 그제서야 자기가 뭘 모르는지 알게 된다는 말도 있죠. 잘못 알고 있던 것을 수정할 수 있는 유연성이 중요한 것이지 비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된 것 자체는 그닥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예전에는 A라는 주장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 B라고 주장하게 될 수 있습니다. 스팀잇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 가상화폐에 몰두되는 현상을 중독이라고 하는 '병리'적 관점에서 봤습니다. 가상화폐 '투기'로 인해서 실물 경제가 위협 받게 되면 결국 그 피해가 고스란히 흙수저들에게 돌아갈 뿐이라 여기며 가상화폐의 해악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스팀잇에 발 담그며 가상화폐 거래도 해보고 직접 경험을 해보니 어느 기술이든 그렇겠지만 단점만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네요.

한 사람의 생각이란 게 이렇게 변화하게 마련인데, 누군가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런 생각들을 편집해서 제출하게 되면 코너에 몰리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블록체인의 영구박제 기술 역시 단점이자 장점인 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른 임상가들이 제 글을 어떻게 볼지 늘 신경을 쓰는 게 사실입니다. 티스토리 블로그에 많은 생각을 적었지만 그 중 일부만 공개로 돌려놓은 것은 다른 전문가들의 눈을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구글 검색 최상단에 노출되는 스팀잇에서도 신경을 더 쓰면 더 썼지 안 쓸 수가 없지요. 다만 그런 것 때문에 자기표현을 과도하게 억제하는 것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프라인에서 제가 심리치료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 스팀잇이 도움이 됩니다. 안 보던 논문도 찾아서 보게 되고, 알던 개념도 스팀잇에 풀어 적을 때는 제가 제대로 아는 게 맞나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게 되고, 여러모로 공부방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거든요.

스팀잇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고 느껴지는 한 저는 앞으로도 계속 꾸준하게 자기표현을 할 생각입니다.

공부하고 질문하고 답을 하고, 답이 틀렸으면 다시 공부하고 수정하면 됩니다.

전문가란 학자와도 비슷한데, 무언가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도상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스팀잇에서의 활동은 그런 배움의 일환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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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나 SNS는 내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이제 뭔가 나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상은 거의 올리지 않습니다. 나만의 강한 의견도 안 올리고, 친구에게도 주소 안 알려줍니다;

그냥 테마를 하나 정해서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올리며 무언가를 배운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자기 오픈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 안 하는 게 좋죠.

어떤 플랫폼이든 공개적인 곳은 장단점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동력을 얻고 소통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 때문에 놓치 않고 하게 되는 듯 하네요. 하지만, 누구든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적인 정보는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합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어요 :)

맞아요 장문의 글을 두고도 피드백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이 꽤 동기부여가 되네요. 저도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인생도 롤러코스트와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잘되겠지 긍정적인 마인드로 꾸준히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화이팅! 보팅하고갑니다. 맛팔 부탁드립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ㅎㅎ

상담공부는 끝이 없는것같아요 슈퍼비전도 갈수록 비싸고
어려운길을 가고계시네요 응원합니다 좋읏 상담자가 되시길

끝이 없어서 힘들기도 하지만(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좋기도 하네요. 좋아하는 분야에서 미답지가 많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응원 감사해요/

스팀잇은 제게도 그런 공간임에 틀림 없습니다.

네 저와 비슷한 용도로 스팀잇을 활용하시는 것 같아요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제 0회 짱짱맨배 42일장]5주차 보상글추천, 1,2,3,4주차 보상지급을 발표합니다.(계속 리스팅 할 예정)
https://steemit.com/kr/@virus707/0-42-5-1-2-3-4

5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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