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하)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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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스에 있던 공중전화기는 지금은 박물관에나 있을 것이다. 전체가 주황색으로 색칠된 큼직한 전화기였다. 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서 송신하는 쪽, 그러니까 입을 대는 쪽의 마개를 열어보란 것이었다. 계산기가 그 작은 공간에 들어갈 리 없으니 이것도 쪽지가 분명했다. 그곳은 귀신이나 범법자들의 아지트로 쓰이고 있던 컴컴하고 구석진 곳이었다. 내가 태생적으로 겁이 많다. 그래서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안 간다면, 1. 나에게 왜 이런 일을 시키냐며 선배들에게 대든다. 결말은 발길질부터 시작하는 폭력의 희생양이 될 공산이 크다. 2. 무서워서 못 갔어요, 라고 실토한다. 좋아하던(순수하게) 여자 선배도 함께 있었는데 그 앞에서 결단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생각의 파편들이 들고 일어났다가 순간 한 곳으로 향했고 나는 순순히 그 방향을 따라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혹여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수화기 뚜껑 여는 모습을 본다면? 십중팔구 수위, 학생, 교수, 세 종족 중 하나일 텐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걱정이었다. 롱 스토리! 그러고 말아야 하나?
수화기 안에서 찾은 쪽지는 기숙사 뒤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숙사는 산을 깎은 자리에 세워졌는데 학교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숙사 뒤편은 기숙사 건물과 산을 깎아낸 낭떠러지의 좁은 사잇공간을 말한다. 다행히 거기에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왠지 기진맥진해진 나는 기숙사 뒤편에 갔다가 주저앉아서 한참을 있었다. 역시나 쪽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숙사 옆으로는 야산 쪽으로 사라지는 샛길이 있었다. 그 샛길은 내가 살던 곳과 방향이 반대인, 다른 자취촌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야산을 넘어가야 했다. 야산에는 학교와 자취촌, 양쪽에서 올라오는 불빛이 은은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야산을 가로지르는 좁은 샛길을 따라가면 봉긋하게 서 있는 두 개의 무덤 앞을 지난다. 쪽지에는 선물이 그 무덤가에 있다고 쓰여 있었다.
밤에 혼자 그 야산 너머의 자취촌에 갈 일이 있으면 야산으로 가지 않고 먼 길을 돌아서 갔었다. 두 배 이상의 거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산길에서 도깨비를 만나느니 몸으로 때우는 게 나았다. 그랬었는데, 밤 12시에 그 무덤까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1, 2 번의 이유때문에 나는 무덤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스산한 야산의 밤공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세 갈래로 갈라지는 산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무덤쪽으로 향할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말았다. 무덤가 근처에서 하얀 실루엣 두 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얼음이 되어 걸음을 멈추었는데 잠시 후 빨간 불빛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담뱃불이었다. 조용히 귀 기울이니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선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험실에서 입는 하얀 가운을 걸치고 놀래키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먼저 들켜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이 형 하면서 다가갔다. 형들은 당황해하다가, 조금 멈칫거리다가, 그러더니 먼저 간다고 하고 훌쩍 내려갔다. 형들을 보고 나서 안도감이 들었었는지 무덤 주변을 아무렇지 않게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선물은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막걸리병 하나만 쭈글쭈글하게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 옛날 막걸리병은 두꺼운 비닐처럼 생긴 재질이라 쉽게 구길 수 있었다. 무덤 주변은 그것 외에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둘러보았다. 밤이라 놓친 걸 수도 있으니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살폈다. 결국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려다가, 선배들이 이렇게까지 장난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얀 막걸리병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하얀 막걸리병 안에 하얀 쪽지가 있었다. 안보일 수밖에... 막걸리병을 뜯고 쪽지를 엷은 불빛에 비췄다. 거기에는 대충 그려진 공학용 계산기가 있었고 하단에 카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실물은 방학 끝나고" 라고 적혀 있었다. 막걸리 잔여물에 젖어 있어서 아까운 계산기가 자칫하면 찢어질 뻔했고 손에서는 시큰한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다.
제대 후 복학해보니 야산은 완전히 깎여 나갔다. 그 자리에 새로운 강의동이 들어섰다. 졸업 후 몇 년 만에 찾아갔을 때는 닭장 같던 선배의 단층 자취방도(그 집은 하숙집이었다.) 그 주변 건물들처럼 모두 허물어지고 현대식 원룸 건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요즘 들리는 얘기로는 피트니스 클럽부터 해서 삐까번쩍 해졌고 큰 길이 뚫고 지나가서 옛 골목은 없어졌다고 한다. 내가 살던 자취방은 이미 그 이전에 허물어져서 다른 큰 길이 지나고 있다. 기숙사 앞쪽으로 더욱 큰 기숙사가 생겨 예전의 아담했던 느낌은 찾을 수 없다. 해녀 조각상과 맷돌이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구멍 숭숭 뚫린 무거운 현무암이었다.
1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몇 달인가를 더 기다리다가 내 돈으로 공학용 계산기를 사야했다. 꿈에 그리던 카시오로 샀다. 그때 그냥 맞고 끝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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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
완전 잊지 못할 추억이겠어요...

카시오계산기...
옛날에 정말 그게 왜케 좋아 보이는지...^^*

역시 이공과 쪽은 이 계산기를 아시네요..ㅎㅎ
받지 못해서 더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된 듯합니다.

상편까지 다 읽었어요. 음, 그니까....선배들 시키는 대로 안하면, 생일에도 죽빵을 맞을 수 있군요.
센 조직 출신이었군요 ^^ ㅋㅋ

학번에 죽고 사는 그런 조직이었죠. 빠따도 여러번..ㅋㅋ

꿈에 그리던 카시오는 결국 돈 주고 사셨군요 ^^

특정 다수의 횡포로 말미암아 제 돈 내고...ㅠㅠ

방학 끝나고 준다던 실물은 끝내 없었던건가요?
용기내어 도전했는데 허무함이;;

못 받았어요..ㅋㅋ
그땐 또 그러려니 했었네요...

무덤썰이군요 ㅎㅎ

무서운 무덤이야기..ㄷㄷ

아! 짖궂은 선배들이군요 ㅋㅋㅋ 그래도 재미난 추억을 선물로 받으셨군요. 좀 무서우셨죠? ㅎㅎㅎㅎ

아뇨 많이 무서웠어요. ㅠㅠ
장난 많이 치고 다니던 때였어요. 쓰레빠 신고 500미터 전력질주 하기같은 쓸데 없는 짓도 많이 했죠.

헉;;
그거 이 부분 까지지 않나요?!
양말 안 신고 하면요;;
20180811_143038.jpg

네 까집니다..ㅠㅠ 앗 쓰라려!!

학창시절 이야기군요!! ㅎㅎ 잘보고 갑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기억이 생생하네요. 고맙습니당..ㅎㅎ

007수준인데요 ㅋㅋㅋ 그 고생을 시키고도 결국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나쁜 엉아들...ㅠㅠ

결국 선배님들이 유니콘님을 놀린 거네요~
나쁜 선배님들 ~~

어쨌거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네요~^^

아마 줄 생각은 있었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아까운 생각이?..^^;;
놀리는 것도 참 수준급이었습니다..ㅎㅎ

그지같은 선배네여~ 아우 그 고생을 시켰으면 번듯한 카시오를 짜잔하고 선물했어야 합니다!!

맞습니닥!! 안주면 막 쫓아다니면서 받았어야 하는데...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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