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본 웹사이트에서 음악 씨디 구매한 이야기

in #busy6 years ago (edited)

벌써 15년 전 일이다, 아라이 에이치新井英一를 TV에서 얼핏 스쳐 지난 건. 그는 청하의 길(혹은 청하 가는 길)이라는 곡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재일한국인이다.


후쿠오카에서 1950년에, 일본인 어머니와 징용된 조선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라던 그는 10대에 가수의 꿈을 안고 가출하여 평생을 방황하다 44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가게 된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청하.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도 그는 부산항에서 울산과 경주를 거쳐 포항의 청하까지 이르렀다. 아버지가 살던 집과 호적을 살펴보고 집 앞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의 이름은 영일만이었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그의 이름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호적에 남아있었다. 그 이름은 박영일.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영일만과 박영일과 新井英一과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큰 영감을 얻었나보다.


그는 그 때의 감회를 앨범으로 발매했고 그게 일본에서 꽤 큰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앨범에는 노래가 딱 한 곡 들어있는데 48절 시조 형식의 40분짜리 노래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를 15년 전에 TV에서 우연히 스쳐지나갔음에도 내 기억 한 곳에 그가 남아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건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와 내가 청하로 벌초를 몇 번 갔기 때문이고, 우연히도 벌초를 다녀온 날에 그가 TV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사실 청하에 묻힌 게 내 증조부인지, 고조부인지도 잘 모르겠다. 더운 휴일날, 아버지를 따라 툴툴거리며 풀을 베러 갔었고 언덕을 두어개 넘어 작은 연못을 둘러 낫질을 하고 막걸리를 뿌리긴 했지만 어린시절의 나에게 그 무의미한 풀베기에는 귀찮음 외에 어떤 감정이 있었으랴.


나는 여전히 거기에 누워계신 내 조상님을 모른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못 배우고 가난했던 그들이 소문에 혹해 전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땅을 밟았다가 다시 빈털터리로 내려와 청하에 터를 잡고 살다가 가셨다는 것은 안다. 전재산을 던져 미지의 먼 세상에 갔다가 다시 익숙한 미지의 땅으로 빈털터리 알몸으로 돌아와 삶을 개척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내 조상의 땅은 경북 북부지방이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익숙한 땅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경북 청하에 자리잡은 것이다. 맨몸으로 청하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했다가 돌아가신 내 조상과, 청하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맨몸으로 인생을 견뎠던 아라이 에이치新井英一의 아버지가 묘하게 겹친다.


작년부터 뜬금없이 머릿속에 그 가사의 단어 몇 개-태평양, 조센진, 영일만-가 떠올랐다. 정말 뜬금없이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몇 개의 영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이 부른 커버버전이거나 음질이 조악했다. 그가 한국어로 부른 노래를 온전히 듣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절판. 구할 길이 없다. 그래서 '아라이에이치, 중고CD'로 검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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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정가 13천원, 중고값 69천원. 씨디값 5배 상승 떡상 5G9요.
내 코인도 저렇게만 올라다오.



중고가격 7만원. 고등학교 때 신해철의 그룹 넥스트N.EX.T. 테이프를 사서 삼성 마이마이에 넣고 늘어지게 들은 이후로 거의 20년만에 처음 사는 음반인데... 걸그룹 싸인이 들어간 씨디도 아닌데... 중고가 7만원은 좀 아까워서 좀 싸게 살 방법은 없나 잔머리를 굴려본다. 구글은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아라이 에이치를 영어, 한자로 번갈아가면서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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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헤헤. 241엔이면 2500원쯤 되렷다.
배송비를 보태도 6천원이라구요.



역시 구글은 답을 알고 있다. 아마존재팬에서는 중고씨디를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같은 물건을 싸게 사면 기분이 좋은 법.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며 아마존 재팬에 회원가입을 하고 이왕 사는 거 같은 판매자의 다른물건도 살펴봤다. 마침 며칠 전에 중고서점에 가서 산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 묘사된 재즈곡들이 생각나서 jazz라고 검색해서 뭣도 모르는 재즈 앨범들도 몇 개 넣었다. 싼건 1엔, 비싼건 1000엔. 이거 완전 노다지네. 와, 음악 좀 알면 보따리상 해도 되겠다. 당연히 나는 음악은 쥐똥만큼도 모르니 앨범 제목이 좀 멋지거나 표지 사진이 멋진걸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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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 캡쳐화면보다 훨씬 많은 앨범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1엔짜리는 뭐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그만 아닌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국주소를 넣어 결제화면으로 넘어가려니 한국으로 직배송은 안해준다. 배송대행지를 이용해야했다. 일본에서 물건을 받아서 한국까지 배달해주는 업체를 검색했다.

가격과는 상관없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이트에 가입하고 배송대행 신청을 하려니 한국에 입고될 때 필요한 개인통관고유번호가 필요하단다. 오랜만의 직구라서 잊고 있었다. 관세청에서 접속해서 액티브X를 대체하는 뭐시기 파일을 두어개 깔고 공인인증서 인증을 받고 개인통관고유번호를 확인한 뒤 저절로 닫힌 창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창을 열어서 다시 로그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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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청: 너 임마, 여긴 회원가입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사이트야.
회원가입은 없지만 브라우저는 재시작 해야된다는거, 알지?



또 문제가 생겼다. 배송비가 3천원쯤 하는데 이상하게 물건마다 배송비가 따로 붙는다. 일부러 묶음배송 하려고 같은 판매자에게 5천엔 정도를 구매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배송료가 7천엔이다. ㅋㅋㅋ12만원 중에 7만원이 배송료라는 게 너무 우스워 다시 맥주를 한 잔 하고 거실을 청소하고 다시 컴퓨터에 앉았다. 아니, 얘네들은 묶음배송이라는 개념이 없나. 같은 가게에서 사면 1개 사든 10개 사든 배송료는 똑같아야 정상 아닌가.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일본은 원래 그런가보다.이야.. 일본 정서 참 특이하네. 하긴 1엔짜리 물건을 어떻게 인터넷에서 팔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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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값 5천원, 배송료 1만6천원ㅋㅋㅋ



1엔짜리 물건만 보고 마음껏 담아 20개 넘게 채웠던 물건을 다시 빼기 시작했다. 물건을 담는 것보다 빼는 것이 더 어렵다. 이 중에 뭘 빼야하나, 전부 자켓도 예쁘고 앨범 제목도 마음에 드는데. 어쨌든 6개의 물건을 최종 선발했다. 아마존재팬에서는 배송대행지의 주소를 넣고 결제를 완료했다. 그 즉시 배송대행지 홈페이지에 가서 '이런이런 물건이 올 예정인데 이거 내꺼니까 받아놨다가 한꺼번에 묶어서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주문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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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선발된 6개의 음반. 물건값과 일본내 배송료로 5만원 정도를 지불했다.



이제 아마존재팬에서 배송대행지로 곧 물건을 발송할 것이고 물건이 배송대행지에 도착하면 내게 연락이 올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보내는 택배비가 2만원은 넘지 않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중고씨디 한 장을 7만원에 사는 것보단 낫겠지. 같은 돈으로 나는 5장의 음반을 더 샀으니까. 그가 62세에 울산 공연에서 불렀던, 48절짜리 노래의 앞부분 영상을 붙인다. 유튜브에 있는 영상 중 그나마 가장 음질이 좋다. 아리랑 가락과 판소리 리듬, 블루스와 포크가 혼합된 노래라고 누군가가 평했다. 일본 직구는 처음이라 이리저리 찾아보고 주문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어제 배송료와 관련된 문의를 넣은 게 오늘 답장이 왔다. 일본어는 한자와 가타카나만 읽을 줄 안다. 대충 추측한 뒤 구글번역기에 돌리니 예상한 내용 그대로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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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온라인 쇼핑몰을 성토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본에 비하면 천국이네요 ㅋㅋ

쇼핑몰 같은 경우에 우리나라가 서비스 차원에서는 소비자에게 많이 유리하게 운영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 알리익스프레스에서도 물건을 몇 개 샀는데 8불짜리 물건의 테두리가 좀 깨져서 왔습니다. 사용상 문제는 없지만 일단 dispute를 걸고 반응을 지켜보니 "너 이거 쓰는데는 지장없지 않느냐. 내가 페이팔로 2딸라 부쳐줄께. 쌤쌤 오케?" 이런식의 답이 돌아오네요.

중국은 막무가내군요. '너 아니어도 살 사람 많다'이건가요. 우리나라에서 그랬다가는 바로 문닫아야 될텐데요 ㅎㅎ

유튜브에서 중국상인 vs 인도상인 동영상을 보니 이해가 좀 갑니다.

오오 재미있게 잘 보겠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진지하다가 한 글입니다. 미치겠구만, 좋다! 4달러!

ㅋㅋㅋㅋㅋ왜 아마존 재팬과 관련된 글에 미군 얼굴이 떠오르는거죠?

화재와 경험의 연계를 시켜서 글을 쓰는 능력이 탁월하시네요..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면 더 좋고요.

아~~~ 이런 노래가 있었군요. 귀한 음반이네요.

나름 의미가 있지만 국내에선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 음반인 것 같습니다. 뒤늦게 듣고 싶어서 외국 사이트까지 뒤적거려봤는데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음반도 직구로 많이 구할 것 같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진못했지만, 진짜 의미있는 음반이네요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겁니다. 내 앞의 모든 현상들에도 의미가 있을테고요. 그 의미를 진지하게 느낄 나이가 아닐 때 지나가버린 것들도 운 좋게 찾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인터넷과 기록매체가 발달한 덕분에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한 때 눈 앞에서 놓친 노래들과 의미들을 음미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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