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커피 #4. 궁극의 생명 (지식의 엣지 5)

in #buk6 years ago (edited)

life.jpg

작년에 잠시 생물책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분야는 유전자 관련 내용이었는데, 고등학생 시절엔 내가 문과에 속해 있어서 못 배운 것인지, 아니면 그땐 아직 유전자 부분이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던 시절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대학에서의 내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는데 이 역시 생물과는 관련이 없었기에 나에게 있어 유전자에 대한 지식은 '복제 양 돌리' 또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정도에서 끝나버렸다. 그래서 작년에 생물책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돌리가 탄생한 지 21년이 지났고,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종료된 지 15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전자 분야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유독 그 부분이 컴퓨터 공학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mRNA의 전사와 수송은 TCP/IP Protocol에서의 data encapsulation/decapsulation을 떠올리게 했고, mRNA의 번역 방법 또한 프로그래밍 시 쓰는 기법과 같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먼저 하려 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려고 한다. 언젠가 mRNA와 data en/decapsulation에 대한 비교 글과 생물체의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비교 글을 써봐야겠다.

앞서 말한 대로 mRNA의 전사, 번역, 수송 방식이 컴퓨터 공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닮아 있어,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갑자기 이 모든 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 있어 보이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오래전 쓰인 책보다는 새로 발간된 책을 찾았다. 오늘 소개하는 책 <궁극의 생명>도 그 중 하나다.


<궁극의 생명>은 당대의 유명한 유전학자, 이론생물학자, 생명공학자, 이론물리학자, 천문학자, 양자역학 공학자, 화학자, 미래학자, 로봇학자의 강의와 대담을 엮은 책이다. 주로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 기술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에 대한 예상인데, 이 강의와 대담이 2000년~2015년에 행해졌기 때문에 지금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번역자가 주석으로 현재의 정보를 달아 놓았다.

책의 초반은 조금 지루한 편이다. 지루했다기보다는 한 편의 강의에 담긴 내용이었기에 수박 겉핥기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단발성 세미나보다는 오랫동안 조금 더 주제를 파고드는 연속된 강의를 듣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이어 흥미로운 내용이 이어져 이곳저곳에 줄을 그어가며 읽었는데, 서평을 쓰는 이 순간은 대체 어느 문단을 인용구에서 배제해야 하는지 고민일 따름이다.



견해 차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과학자 간의 견해 차이에 대한 태도였다. 그 한 가지 예는 '자연 선택'에 대한 것인데, 리처드 도킨스는 선택의 표적이 '유전자'라고 주장하는 반면, 에른스트 마이어는 '개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실명을 거론하며 상대방의 이론이 틀렸다고도 한다. 상대방의 비난에 감정부터 상할 법도 한데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신기했는데, 아래의 글을 보자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과학은 동의하는 것은 제쳐두고 견해 차이가 나타나는 주제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입니다. 모두가 모든 것에 동의하는 과학은 죽은 과학이에요.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나?


그리고 6단계가 이어집니다. 문화적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를 대신해 주된 추진력이 되면서 출현한, 다윈 시대의 종말인 시대로요. ‘문화적’이라는 말은 생활 조건상의 큰 변화가 인류의 기술 확산과 생활 방식을 통해, 즉 번식을 통하기보다는 서로 간의 배움을 통해 추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을 퍼뜨리는 시대였지요. 그리고 앞으로 7단계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살아갈까?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았다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 하고, 그것의 가장 쉬운 방법은 자손을 낳는 것이었다. 인류는 이제까지 여러 방법을 통해 지식을 전달했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소수의 사람만이 대중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지금은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유튜브로 영상을 공개하는 등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도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고, 앞으로는 어떤 방법이 되었든 더 편해질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미래의 출산율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까?


저장 가능한 것


우리 인간은 아날로그일까, 디지털일까? 우리는 아직 이 질문의 답을 모릅니다. 인간의 경우 정보는 주로 우리의 유전자와 뇌, 두 곳에 들어 있습니다. 유전자에 들어 있는 정보는 DNA의 네 글자를 통해 암호화된 디지털 정보임이 분명해요. 하지만 뇌에 있는 정보는 아직 큰 수수께끼입니다.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기억은 뇌에 있는 수십억 개의 뉴런들이 서로 연결된 접합 부위인 시냅스의 결합 세기 변이를 통해 기록되는 듯하지만, 우리는 시냅스의 결합 세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지 못하죠. 우리 뇌에서의 정보 처리가 어느 정도는 디지털이고, 어느 정도는 아날로그라고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아날로그라면,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 컴퓨터로 내려받을 때 섬세한 감정이나 특질이 얼마간 손실될 수 있어요.

영화 <루시> 때문일까? 아니면 컴퓨터의 메모리와 디스크를 사람의 뇌에 비유해서일까? 미래에는 뇌에 담긴 정보가 데이터로 저장되고, 몸은 기계로 대체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로는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에 대한 정보만 저장할 수 있고, 뇌의 동작 방법은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몸을 재구성하는 기술과 뇌에 담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 중 먼저 실현되는 기술은 무엇이 될까? 언젠가는 죽지 않기 위해 냉동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기록하는 날이 올 것 같다.


유(有)


내가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답은 사실 어느 책을 읽어도 구할 수 없다. 이제까지 알려진 우주의 기원은 빅뱅이었고, 빅뱅의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유(有)였을까? 창조자가 있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을까? 그런데 창조자가 존재했다면, 이미 그 시점이 무(無)가 아니다. 그냥 아래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만물에 자연적인 원인이 있다는 다윈의 설명 앞에 창조적인 우월한 정신에 대한 믿음은 전혀 필요 없게 됩니다.

가까운 미래에 누가 속시원한 답을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내 전공이 컴퓨터다 보니 책 내용 중 진화학보다는 컴퓨터와 관련된 미래에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서평을 남길 것이라 예상된다. 특히 관심이 가는 내용을 썼던 몇몇 학자의 책은 따로 찾아서 읽을 예정인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직 <종의 기원>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유명한 제목이라 그냥 간과하고 있었나 보다.

생물, 천문학, 컴퓨터공학, 물리학, 화학 등 여러 방면의 주제가 나오다 보니 세세한 내용은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정도만 파악해도 좋을 것 같다. 수능을 마친 고3, 또는 교양으로 과학, 공학을 접한 대학생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생명+공학의 미래. 재밌지 않은가?
지금은 나무를 길러서 베어낸 다음에 탁자를 만들지요. 앞으로 50년 뒤에는 그냥 탁자를 기르게 되지 않을까요?



이전 글 : 언어의 온도
다음 글 : 온 트레일스


logo_manamine_mail.png

Sort:  

탁자를 기르게 되지 않을까요가 무슨 뜻이지? 잠깐 어리둥절했어요. xD
상상해보니까 놀라움 절반 섬뜩함 절반입니다.ㅎㅎ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나무 한그루 키워서 버리는 부분 없이 쓸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요? (나무에게는 미안하지만요.)

사실 저부분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신기했고,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배양육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었으면 좋겠어요.

오 그러네요. 버리는 부분 없이 쓸 수 있네요.
아 왜 전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걸까요..
아직 멀었..어...ㅠ

전공이 컴퓨터시군요! ^^ 저의 첫 번째 전공도 컴퓨터공학입니다. 제겐 안 맞는 옷이었죠. 전공을 바꾸고 나서 그 근처엔 안갑니다.ㅋ
평소 강의를 엮은 책을 재밌게 보는 편입니다. 말을 받아적은 글은 좀 더 쉽게 다가오는 편인 거 같아요. 이 책도 그런 면에선 구미가 당기네요.^^

컴퓨터가 전공이라 꽤 오래 붙들고 있었는데, 이제 그쪽 일은 안하려고요 :) 그런데 일을 다시 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읽기 싫던 전공 관련 내용이,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나니까 그냥 흥미 목적으로 다시 읽고 싶어요.

북이오링크가 이렇게 걸리는 군요.
처음 봤네...ㅎㅎ
북이오에서 무슨책을 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패쓰해야지... 어렵당....ㅋㅋㅋㅋㅋ

ㅋㅋㅋ 이럴수가.
북이오가 스팀페이하면 지불하는 것도 간편해서 해외 살면서 이용하기 편한 것 같아요.

아 저도 해외에 있으면서 한국책을 좀 보고 싶은데 영 불편하더라구요.
아마존에는 얼마 없고.... 한국 전자책 어플들은 죄다 국내영업만 해서 영 불편하고....ㅜㅜ
북이오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될것 같습니다!!!
책 종류만 조금 더 많아지면 좋을듯.....하네요 ㅎㅎ

그건 그래요. 검색하면 없는 책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보고싶은 책 몇 권 추려놨어요 :) 시간이 지나면 늘어나겠죠.

디지털과 아날로그 부분이 참 흥미롭군요...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0과 1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본인 인간의 기억은 불연속적인 무언가로 되어있고, 언젠가 인간의 기억을 디지털라이징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 불연속값에 한없이 가깝지만 완벽히 같지는 않은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구현되어 있는 일렉기타의 이펙터 같은 경우도 파형 자체를 변조하는 아날로그 이펙터와 그걸 흉내내는 디지털 이펙터가 있고, 인간의 귀로 구분하기 힘든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같지 않은 느낌의 그 구간 어딘가... 였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완벽하게 디지털 복제가 가능하면 소름돋잖아요...-ㅅ-

DNA의 염기는 A,G,T,C(또는 RNA에서 A,G,U,C)의 조합이라 디지털이라고 보더라고요. 심지어 세가지 염기의 순서대로 아미노산을 만들어 내므로(ex.AAA가 리신, UAA가 종결 코드. 아니 종결 코드라니) 이미 반쯤은 0과 1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셔도 될 것 같아요.

기억은 저도 막연히 아날로그라고 생각했지만, 잊었다고 생각한 옛 기억을 누군가가 말해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런건 마치 파일 삭제는 했으나, 완전 포맷을 하지 않아 복구가 가능한 느낌인데..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답을 찾겠죠. ㅎ

그런데 너무 완벽하게 복제가 되지 않으면 그게 더 소름 아닌가요? ;ㅂ ; 어느 부분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할 지 모른답니다.

아... DNA 염기배열... 오랜만에 보는군요. 저는 그냥 막연하게 염기보다는 뉴런의 신호전달 쪽으로만 생각해서 예를 들면 전기 자극 세기가 정확한 계측이 불가능한 불연속 값이라거나, 아니면 자극의 지속도 같은 쪽으로만 생각을 해서...

저는 그래도 인간(+ 그 외 여러 동물)이 아날로직한 뭔가를 갖고 있었으면 좋겠어요-ㅅ-;

어릴 때 꿈이 생물학자였는데, 역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네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에 대해서 '이건 밝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체념하는건 학자의 자세가 아니겠지요...-ㅅ-ㅋㅋ

신호 전달은 과정이고, 정보를 어떻게 취합해서 기억하는지가 문제일 것 같은데, 그런 부분도 생각해보니까 신기하네요.
예를 들면, 오렌지를 떠올리면 색과 맛, 향이 함께 떠오르는데, 그러면 시각, 후각, 미각 정보가 한번에 저장된건지. 그런데 또 오렌지를 보지 않고 직접 그려보라고 하면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는걸로 봐선 -_ -;; 이미 저장될 때 정보가 손실된 것 같기도 하고요.

여튼 저는 누군가가 다 밝혀냈음 좋겠어요. ㅋㅋㅋ

흑 손실압축 ㅠㅠ
저도 공부할 때면 무손실 압축이 됐으면 좋겠는데
데이터 로스가 로스대로 심하고 검색 기능도 영 션찮고...
인덱싱 잘 되는 뇌 삽니다...ㅠㅠ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써니님 전공이 컴공...!!!!!
매력의 끝은 어디인가요 +_+

으음.. 매력은 신농님이 더!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2
BTC 61660.23
ETH 3056.45
USDT 1.00
SBD 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