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리뷰#9] 28- 생존본능 뒤에 남겨지는 삶의 의미

in booksteem •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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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본능 뒤에 남겨지는 삶의 의미


정유정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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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보문고 ( ISBN : 9788956607030 )



멍하니 누워서 딱히 할 것도 없고 마침 그냥 소장하고 있는 영화를 무심결에 플레이한 것이 화근이었다. 작품성도 좋고 꽤 흥행도 했던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이완되었던 몸에 기합이 들어간다. 18인치 모니터에 압도당해 버린다. 난 관찰자인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그 세계에 갇혀 모든 체험을 해야 하는 수동적인 참여자로 탈바꿈했다. 현실감이 넘치는 묘사도 공포스러웠지만 더더욱 잔인한 건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는 작가의 '가차 없음'이다. 작가는 의도대로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원래 보여주려던 바를 타협 없이 모두 찬찬히 계획대로 보여줘 버린다. 영화가 끝났고 나는 완전히 멍하니 우울하게 그 이야기를 곱씹는다. 생생하고 끔찍하고 잔혹한데 그래서 작품성이 돋보였다. 강렬한 세계 경험이었다. 세상 세기말이 된듯한 무기력감은 며칠은 내게 머물렀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도 그랬다.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는다. 알래스카와 개썰매에 참여하는 남자라니...그러다 어느 순간 내 발이 그 세계에 내디뎠고 책장을 모두 덮을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작가의 빈틈없는 자료조사와 글재주로 탄생하는 생생하고 이해할만한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은 그 세계를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게 만든다. 등장인물에게 대입해 작은 '희망'을 꿈꾸다가 이내 무력감을 느껴버린다. 작가는 동정심보다는 원래 뼈대와 구조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잔혹하게도 멋지게 마무리되는 소설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알래스카 썰매대회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개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던 재혁은 한국으로 돌아와 유기견을 구조하고 돌보고 치료하는 강아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치료하고 돌보게 된 '쿠키'와 '스타'는 그의 위안이자 희망인 가족이다. 그는 개를 위한 쉼터 드림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기준은 아내와 돌배기의 아이를 둔 전형적인 소방대원이다. 물러섬이 없고 강인하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으며 한 번 뱉은 약속은 꼭 지켜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동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잘못된 양육 행동으로 상처를 받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한참 엇나간 젊은 청년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우는 개에게 쏟아냈고 군대 시절에는 상관의 개를 잔혹하게 죽여 군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는 대상은 절대 잊지 않는다.

링고는 인간의 변덕에서 버려지고 투견장에서 살아남은 늑대개다. 영민하고 눈치가 빠르며 힘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며 자제력도 있다. 인간을 믿지 않고 오로지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에게 '스타'라는 달빛이 비쳤다. 이제까지 삶은 '스타'를 만나기 위한 여정인 것 같다.

수지는 병원의 간호사이며 '노'라는 거절을 못해 '네수지'로도 불린다. 그녀에겐 안경공파의 자부심이 있는 아버지와 군인 신분인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 한 번 울면 무너질까 봐 어머니가 죽어도 울지 않을 만큼 강인했고 독해 보이는 그녀는 사실 가족이 있기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윤주는 독종 사회부 기자다. 어릴 적부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 기자정신이 투철해서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기면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윤주에게 날아든 투서로 인해 재형을 무너뜨리는 기사를 쓰고 재형을 취재하려고 찾아간 화양시에 갇혀버리게 된다.

29만의 화양이라는 도시에 전염병이 창궐한다. 사람과 개 모두에게 공통으로 전염되는 '빨간 눈', 원인도 감염경로도 확인되지 않은 원인불명의 바이러스, 빠른 전염속도와 높은 치사율, 죽기까지 소요되는 무척 짧은 시간이라는 재난은 화양을 덮쳤고 세상은 화양을 고립시켜버린다.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의 생존본능이 얼마나 잔혹해지고 이성을 잃게 만들고 인간의 품격이 얼마나 힘이 없는 말인지 보여준다. 바이러스보다도 더한 비극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본능과 희망 없는 디스토피아의 어둠이 가득하다.

점차 구분됐던 개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화양시에서 겹쳐지고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더 이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느새 세상은 투견장과 다름없다. 너의 죽음이 나의 삶을 의미하는 세계. 생존본능이란 명분으로 모든 폭력성이 용인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분명 여전히 선행과 동정 호의를 보여주고 사랑을 하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그 세계의 어둠과 우울함에 압도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역시 살고 싶다. 살려달라 그리고 살리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저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선의를 보여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잃고 희망을 잃었을 때 남겨진 내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류애를 가질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도 장례 봉사를 하던 노인처럼 묵묵히 세상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도 후회는 늘 등장한다. 링고는 '그 매립장에 스타를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수진은 '내가 아파트에서 10분만 빨리 나왔으면 그 여자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기준은 '하루만 먼저 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화양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 후회하는 순간에도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나 일상은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잃기 전까지는 진정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없다. 세상이 모두 끝나 보이는 순간에도 여전히 무언가 빛나는 것은 남아있다. 상실의 슬픔과 아픔으로 남은 가치 있는 존재까지 잃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으면 한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끝까지 원래 계획대로 모든 걸 잃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비극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슬픔과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사는 것만 같은 생생한 착각은 역시 우울하다. 결국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과 의미는 대체 뭘까? 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이 소설에서 빠져나오려면 며칠이 또 소요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챔프투견장에 팔려간 어느 여름 이래, 링고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변덕스러운 호의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나의 삶'이 '너의 죽음'을 의미하는 투견판에서 스스로 살아남았다.
링고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걸어 어느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욕망이고, 느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육감이며, 충동을 누르고 때를 기다리게 한다는 점에선 자기명령이었다. 43page


그는 모욕을 견딜 줄 아는 개였다. 인간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훈련이 잘된 개였다.49page


이 개는 당신의 '마리'야.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책임진다는 거야. 편의에 따라 관계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211 page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3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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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출석부 호출로 왔습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고생 많으십니다.

인간의 세계와 개의 세계가 겹쳐짐, 바이러스 전염병..
기존의 "한국 소설"이라는 통념에서 몇 발작 떨어져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네요. 기억해둘게요.

정유정 작가님 소설은 확실히 그녀만의 고유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제가 보지못한 다른 의미들도 찾을 수 있는 소설일거에요. 무엇보다 재밌는게 장점! +_+!

눈 먼 자들의 도시 가 생각나네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감염된 사람들은 고립되고
대신 이 소설엔 개가 끼어있군요

오 정말 그렇네요. 눈먼자들의 도시는 영화밖에 보지 못했지만 유사한 점이 많아요. 네 개가 등장해 훨씬 흥미롭고 섬뜩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