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의 새로운 맛, 단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メモリーズ, Memories, 1995)

in #aaa5 years ago (edited)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님은 젊고, 상당히 특이하신 분이었다. 촌동네에서 당시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어는 영어로 가르친다'는 철학으로 영어시간에는 영어로만 이야기 하셨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선생님도 아무렇게나 떠든 것 같고 학생들도 아무렇게나 알아들은 것 같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학생에게 아무나 한 가지 주제를 잡아서 영어로 3분 이상 발표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도 했다. 크고 작은 사고들로 정학을 앞둔 친구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에.. 위 노 댓 위 해브 속담 암치킨 꼬꼬댁 하우스폭삭"으로 시작하는 발표로 정학을 면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지만, 그가 점심시간마다 틀어줬던 영화들이 내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덕에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과 시계태엽오렌지도 볼 수 있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돼지, 뉴질랜드산 영화 전사의 후예도 볼 수 있었다. 메모리즈를 알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다. 자그마치 고등학교 2학년때, 그가 아니었으면 평생 보지 않았을 이 작품들을 접했다. 작은 컴퓨터실에 50여명의 아이들이 바글바글거리면서 모여서, 각도가 정면에서 조금만 빗겨도 화면이 시커멓게 보이는 40인치 남짓한 프로젝션으로 보긴 했지만.

메모리즈는 서로 관계가 없는 내용의 단편 3개를 묶은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1편, 그녀의 추억(彼女の想いで / Magnetic Rose), 모리모토 코지森本晃司 감독

우주 폐기물을 정리하던 주인공들은 우연이 SOS신호를 받고 구조에 나선다. 이런류의 스토리에서, 우주에서 SOS신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 위치에 무시무시한 우주괴물이 있거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어 없어진 빈 우주선이 기계적으로 신호를 발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항상 그렇듯 주인공들은 그쪽으로 접근한다. 모선母船에는 운전자가 남고, 자선子船에 2명의 구조요원이 탑승하여 조난신호를 추적해 들어간다. 발신지는 이미 죽은지 오래된 유명 오페라 가수의 우주저택. 유명세도 잃고 애인에게 배신당한 가수가 저택에서 쓸쓸히 죽어가면서 남긴 원혼(혹은 전자신호)이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저택에 가둬놓는다는 컨셉이다.

두 구조요원이 각자 원하던 것들이 눈앞에 환상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의 욕망이기도 하고 그들의 상처이기도 하다. '구조요원들이 자기 눈 앞의 장면들이 환상임을 알아차리고 빠져나올 것인가'에 집중하며 흥미진진하게 볼만하다. 상투적인 주제이지만 고통없는 눈앞의 환상세계, 내가 극복해야 할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세계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인가. 모선母船의 운전자가 보내는 비상신호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환상에 남고 누군가는 현실로 돌아오려고 애쓴다. 성인 입장에서는 셋 중에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2편, 최취병기(最臭兵器 / Stink Bomb), 오카무라 텐사이岡村 天斎 감독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평범한 연구원, 그가 심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고는 회사에 들어와 또 다른 약을 찾는다. 동료직원의 조언으로 실험중인 약을 하나 더 먹고 약기운에 잠이 드는데 꺠어나니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사망해있다. 어째서 나만 살아남은 것일까 여기저기 움직이다가 비상시스템의 작동으로 본사의 높으신 분과 통화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 회사는 망한다. 절대 이 일을 발설하지 말고 일단 XX위치의 XX약을 챙겨서 도쿄로 올라오라'는 높으신 분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따른다. 아, 까라면 까고 오라면 오는 성실 그 자체의 훌륭한 샐러리맨 정신.

안타깝게도 그는 신약에 의해 살인악취를 내뿜는 생체무기가 되어버렸고, 그가 성실히 도쿄로 이동할수록 많은 사람이 죽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군대를 동원한 정부의 갖은 방해와 공격을 견뎌가며 도쿄로 향한다. 그의 성공은 일본의 멸망을 의미하고, 그는 너무나 성실하다.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셋 중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3편, 대포도시(大砲の街 / Cannon Fodder), 오토모 카츠히로大友克洋 감독

가장 상징적인 에피소드. 주인공네 가족은 모두 대포와 관련된 일을 한다. 더 크게 보면 주인공이 살고있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대포요새이며 하루 종일 대포를 준비하여 공격하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여 대피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적은 누구인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그들이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아이는 학교에서 대포에 대한 교육을 받고, 아버지는 대포를 장전하고 발사하는 일에 하나의 부품으로 일하고, 어머니는 화약 제조공장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림체가 다소 실험적이고 설명이 불친절하다.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내 인생도 이렇지는 않은가'하는 생각으로 확장된다. 나는 뭘 위해 살고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노력들은 과연 실체가 있는 일인지 정답없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된다.

image from Naver Movie
본 포스팅의 모든 이미지는 네이버영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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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도시
우리네 인생과 같네요 뭘 위해 일하는가?

직유적으로는 북한이나 군국주의 국가들이 생각나고, 은유적으로는 일방적인 사회화로 의심없이 체화된 취향, 신념, 가치관이 생각나더라고요. 개인의 행복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미디어나 정부, 힘 있는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이런 단편 애니가 있었나요 고등학생때 애니 꾀나 봤다고 생각했는데 못봤네요 한번 다운받아봐야겠어요~

셋 다 지금봐도 촌스럽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그림체도, 내용도.

우라사와 나오키 원작일까요? 비슷한 그림이야 많겠지만. 이번 리뷰는 흥미가 가는데 또다시 구하기가 힘들어 보이는 친구로군요. 답은 '웹 짱하드' 인가?

오.. @daegu가 소수점님이 인정하는 영화추천 블로거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군요. 더 분발하겠습니다ㅋㅋㅋAAA태그 글에서는 흥미가 간다는 반응이 가장 반갑고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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