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35 - 눈에 띄는(띄고 싶은) 한 노인.

in #kr-writing5 years ago

한 노인이 눈에 띄었다. 그 노인은 7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다. 키는 175cm 이상 되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180cm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연령대에서는 꽤 큰 키다. 바짝 마른 체형이라 팔다리가 유난히 길어 보인다.

그가 내 눈에 띈 이유는 ‘당연히’ 그가 내 ‘눈에 띄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수영을 끝내고 치료 중인 어깨 찜질을 위해 한쪽 구석에 있는 뜨거운 자쿠지에 몸을 담갔다. 평소에는 그곳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곳에 몰려있는 아줌할머니들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듣고 있으면 모기향 연기 속에 빠진 모기가 된 것 같다. 불편함을 넘어서 위험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그 대화 때문에 어지러워서 바로 나온 적이 있다) 그 근처는 웬만하면 접근하지 않는다.

다행히 그날은 한쪽 구석에 조용한 중년의 남자 한 명만 있었다. 안심하고 자쿠지에 들어가서 어깨를 마사지했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 노인이 걸어온다. 앞서 말한 그 훤칠한 노인이다. 그는 터프하게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어깨를 쫙 벌리고 주위 공간이 전부 자기 거라는 듯이 긴 팔을 앞뒤 좌우로 휘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렇게 걷는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아. 영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에 나온 최민식의 걸음걸이다. 조직 보스(호랑이)의 뒤에서 그 위세가 자기 것인 양 걷는 여우의 걸음걸이다.

하지만 그 노인이 걸어오는 모습은 터프하긴커녕 우스꽝스러운 데다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근육이 하나도 없이 비쩍 말랐고 팔다리가 길어서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 악몽’에 나오는 해골 캐릭터(잭)처럼 보인다.

그 노인이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걷는 모습에서는 ‘터프함’, ‘위세’, ‘남자다움’, ‘힘’ 같은 것과 정확하게 정반대로 대극對極되는 우스꽝스러움이 흘러넘쳤다.

그 노인은 “어허~~~”하는 소리를 내면서 자쿠지에 들어왔다. 영역표시 본능이 아직 남아있는 수컷 사피엔스들이 내는 전형적이면서 일반적인 소리 표시다. 그 노인은 옆에 있는 조용한 중년 남자와 대조적으로 연신 고개를 터프하게(우스꽝스럽게) 까닥거리며 “아아하~~”하는 소리를 낸다.

조용한 중년의 남자는 바로 그 자리를 떴고, 나 역시 바로 일어나서 샤워실로 들어갔다. ‘차라리 아줌할머니들의 모기향(대화)이 더 낫군.’

샤워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가장 구석자리로 갔다. 샤워기의 물을 틀자마자 콧노래 소리와 함께 그 노인이 들어왔다. 그 노인은 비어있는 넓은 자리를 놔두고 내 옆에 옆의 칸으로 왔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연신 “어허~~~”하는 영역표시 소리를 낸다. 나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 다음 편에 계속.

#수영장에서35

Sort:  

재수 옴 붙었습니다, 그려.
그런 꼴 보면 하루 잡치게 되더라구요.

댓글 고맙습니다. 나름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4
BTC 63960.62
ETH 3142.95
USDT 1.00
SBD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