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 8. 나는 적당하다.

in #krsuccesslast month (edited)

나는 적당하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관대하지는 않다. 나는 적당히 유능하다. 남들에게 무능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일을 맡길 때 맨 처음 떠올리는 그런 능력자는 아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유능하다’는 말은 유능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나는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매너 있고 적당히 잘생겼다. 나는 어중간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아무도 아니야’라고 말할 것 같은, 그저 적당한 사람이다.

바람 때문이었다. 봄이었고, 바람은 육감적일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적당한’ 봄바람이 아니었다. 수인은 그 바람 속을 걸으며 자신이 그저 적당하다는 걸 실감했다. 계속 이대로 걸어가다 보면, 아무도 아닌 내가 봄바람에 녹아 점점 투명해질 거라고,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반투명해진 나를 무감하게 뚫고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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