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31 제3차 전역시작의 작전적 의미와 정치적 의도의 차이steemCreated with Sketch.

in #zzan5 years ago

스탈린 모택동.jpg

중공군 제3차 전역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중공군은 그 기간 동안 서울과 37도선 이북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제2차 전역이 끝난이후 펑더화이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전력을 회복한다음 제3차 전역을 실시하고자 했다. 대규모 전투로 인해 부대원들이 극도로 지쳐있었고 부상자도 증가해서 휴식을 취하면서 시급하게 부대를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방으로부터 물자 공급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부대에 동복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탄약과 식량도 제때 보급되지 못했으며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이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을 51년 2-3월 경 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즉시 제3차 전역을 시작해 신속하게 38선을 돌파하자고 주장했다.
50년 12월 13일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문에서 “현재, 미,영 각국은 자신의 군대를 정비해서 다음 전투를 치루기 위해 우리에게 38선 이북에서 남진을 멈추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38선을 넘어 진격해야 한다. 만약 38선 이북에서 멈춘다면 매우 불리하게 될 것이다”(332, 주45)

한편 펑더화이는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접고 제3차 전역을 수행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한 전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12월 19일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쟁은 여전히 상당히 장기적이고 어려운 전쟁이 될 것입니다. 적군은 진격에서 방어전술로 전환했으며, 전선을 축소하고 병력을 집중해서 전선에서 직선상의 전투력을 강화하여 연합작전에 유리한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 주석께서 보낸 13일의 전보를 받은 후, 현재는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지만 공격을 받아 저지를 당하거나 전투의 승리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333. 주 47)

펑더화이의 군사적 고려와 달리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신속하게 38선을 넘어 공격한다는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왕쟈샹과 그로미코는 50년 12월 5일의 대화에서 신속한 중공군의 공격에 의견을 같이 했다. 왕쟈샹은 “정치적 각도에서 볼때, 중국군이 성공적으로 진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히 38선을 넘어 진격할 것인가?”를 그로미코에게 물었고 그로미코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매우 적절하다”고 답했고 왕쟈상도 동의했다.

한편, 소련과 중국의 생각과 달리 국제적인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12월 5일 왕쟈샹과 그로미코가 회담을 하던 날 “버마, 이집트, 인도 등 11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과 조선의 군대가 38선을 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연합국과 영국, 인도 등 국가들로 계속해서 중국정부에 휴전조건을 탐색했다”(335)

이에 대해 중국은 다음과 같은 다섯개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군사행동을 중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5개항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의 모든 군대 철수, 대만해협과 대만에서 미국군대의 철수, 조선문제는 반드시 조선인 스스로 해결해야 함.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준비하기 위한 4개국 외교장관회의의 소집 등이었다. 물론 이런 중국은 이런 조건에 대해 소련과 사전 협의를 거쳤다.

션즈화는 이런 정치적 이유로 인해 펑더화이의 진격중지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336) 그러나 미국이 실제 이런 조건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하는 점을 생각해보단면, 마오쩌둥의 상기 5개조건은 군사적 행동을 계속하기 위한 핑게거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마오쩌뚱이 군사적인 요구와 조건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제3차 전역은 제2차 전역의 작전적 기세를 유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12월 29일 모택동이 보낸 전문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겨울 내내 우리 지원군이 휴식을 취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의 온갖 억측을 야기하고, 민주진영(사회주의 진영)의 일부 국가에서도 각종 이론이 발생할 것이다.”(336. 주 52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1책, pp. 741-742)

한편 이에 대해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3차 전역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더라도 지원군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가 될 것이다. 전투과정에서 유엔군은 계획적으로 철수하겠지만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은 일부 지역을 점령한 것 이외에는 적들에게 의미있는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336. 주 53. 팽덕회군사문선, p.383)

펑더화이는 38선 이남이라는 지역보다는 유엔군의 전력을 타격하는 것에 주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마오쩌둥과 펑더화이는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하는 점에서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을 현위치에 고착시키면서 부대를 재편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유엔군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만일 제3차 전역을 펑더화이 생각처럼 치루었다면 유엔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제4차 전역에서 중공군의 작전을 고려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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