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해야 하는 것을 내가 듣지 않고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알 수 있겠는가?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상담을 하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평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러기 어려웠던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손톱을 심하게 물어뜯어서 열 손가락의 손톱 모두가 거의 없어지기 일보 직전인 내담자를 상상해 봅시다(픽션임을 밝혀 둡니다). 이 내담자는 손톱 물어 뜯는 것이 문제가 되는 수준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이 버릇을 고쳐보고 싶은데 도무지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고,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고자 상담소까지 찾아오게 됩니다.

상담자는 손톱을 뜯게 되는 상황이 특별히 있는지 묻습니다. 내담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물어뜯는 행동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상담자는 그럼 최근에 언제 그런 경험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내담자는 일하던 중에 상사에게 급하게 보고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상사가 회사 내 회의실에서 회의 중이라 그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극도로 싫고 그 상상을 하니 불안해서 빨리 보고를 해야 함에도 자기 책상에서 손톱을 물어뜯은 일을 기억해 냅니다.

상담자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와 비슷한 과거 기억이 있다면 말해 보라고. 이 내담자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의 다툼이 빈번했고 그럴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 기억을 떠올리니 어떤 느낌이 드냐고 상담자가 묻습니다. 너무 무섭고 불안하며 나 때문에 부모님이 싸우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상담자는 이 기억뿐만 아니라 내담자가 말하는 다른 기억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추상화해냅니다.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과도하게 자기 탓을 하는 경향이 있었고 자기 때문에 일이 어긋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게 됨을 통찰하게 됩니다. 손톱을 물어뜯는다는 행위에 자기처벌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죠. 사실 이 내담자는 늘 우울하고 무기력한 느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각하지 못 하고 있던 손톱 물어뜯기의 의미에 관한 통찰이 온 이후 손톱을 물어뜯는 행위의 빈도가 차츰 줄어들게 됩니다.

모든 상담이 이렇게 깔끔하게 기승전결식으로 전개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깔끔하게 전개되는 상담은 천 사례 중 한 사례나 될까 싶네요.

상담 과정을 통해 내담자는 손톱을 물어뜯는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의미를 찾아갈 수 있게 촉진하는 역할을 했죠. 평소에는 손톱 물어뜯기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어렵습니다. 잦은 야근에 먹고 사는 게 바쁘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고, 숙고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사례의 경우 부모님의 싸움을 유발한 사람으로서의 죄책감이 이 사람 정체성의 핵심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처벌의 표현형(?)이라 할 만한 손톱 물어뜯기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정체성에 위협이 될 수 있죠. 아무리 나쁜 정체성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형성되고 강화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협 당하는 것은 극도의 불안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 이제 손톱 물어뜯기가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되돌아 보자!'고 작심하고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한들 불안을 뚫고 한 걸음 내딛기란 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상담자가 옆에서 촉진하면 이 불안을 보다 수월하게 뚫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편화돼 있던 기억과 감정들에 어떤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지만 내 의식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 한 채 날 힘들게 했던 기억과 감정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그것들에 의식 속 자기 자리를 부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일상에서는 저마다 '자기'를 위주로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심리사를 비롯한 상담자들은 자기가 아니라 내담자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공부하고 수련받고 전문가가 된 이후에도 쉼 없이 지도감독을 받습니다. 내담자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이런 상담자의 노력을 통해서 내담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내적 참조 체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위 내담자의 경우 자신이 그 동안 남 탓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자기 탓을 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봤구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 모든 일이 나 때문일 수 있나! 이해는 변화의 서막이죠. 이제 다른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을 내가 듣지 않고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알 수 있겠는가? 상담의 기술(3판, 주은선 역) p. 120.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특히 소외되었던 생각이나 감정, 기억 등을 의식으로 끌고 들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돕죠. 내담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에 관해 말하고, 상담자는 재진술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반영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니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즐기는 스티미언들이라면 더 그렇겠네요.

하지만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 한 채 그것에 이끌려 갈 때가 많죠. 상담은 이 관계를 역전시킵니다. 상담자와의 협업을 통해 내담자는 생각이나 감정이 오가는 밑바탕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마음챙김적인 요소도 있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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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 전공에 slowdive 같은 마이너한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또 계시다니 신기한 일이네요. 스팀잇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맞팔해요~

마음챙김명상의 호흡이나 걸음, 움직임과 상담자는 비슷한 역할을 하죠. 저는 이것들을 배의 닻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를 수 있게 도와주는 닻이죠.

배의 닻이라는 비유가 좋네요. 생각이나 감정에 같이 휩쓸려 가면 안 되니 상담자라도 중심을 잡고, 흘러가는 마음을 내담자가 볼 수 있게 도우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마음챙김명상의 호흡이나 걸음, 움직임과 상담자는 비슷한 역할을 하죠. 저는 이것들을 배의 닻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를 수 있게 도와주는 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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