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과정: 내적 소외와 관련하여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우리가 보통 소외감이라는 말을 쓸 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어떤 사람의 이미지와 슬픔, 외로움, 공허함 같은 감정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즉 사회적인 소외를 떠올린다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소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이러한 능력을 후천적으로 학습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내적 소외라고 하는데요.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자기 감정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자기 감정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동생이 미워 죽겠는데 니가 누나니까 혹은 니가 형이니까 참아라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감정이지만 그것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돼 버리는 것이죠.

또 부모님이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바쁘다 보니 은연 중에 아이가 어른스럽게 행동할 때 폭풍 관심과 인정을 주는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혼자서 밥 먹고, 방청소 하고, 숙제도 미리미리 하고, 이렇게 했을 때 부모의 긍정적 피드백을 받게 되는 경우 이 아이는 떼 쓰고 투정도 부리고 부모에게 해달라 뭐 사달라 의존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게 됩니다. 애어른이 되는 것이죠.

동생에 대한 미움을 억누를 때, 그리고 의존적인 욕구를 드러내지 않고 어른처럼 행동할 때 부모의 관심과 인정을 받게 되면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까요. 강요된 가치에 자신을 맞추려 하는 아이는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지닌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 아이가 어떻게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겠습니까.

상담 이론을 배우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상담자가 로저스입니다. 상담을 심리학이라고 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로저스는 위와 같은 과정을 가치의 조건화conditions of worth라고 말하면서 가치조건화의 해독제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수용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감정이든 욕구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가치조건화를 학습하게 됩니다. 가치조건화를 통해 사회의 규범이나 권위를 내재화하는 것은 그 나름의 기능적인 면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안팎에서 해도 되는 행동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죠. 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동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모의 사랑을 담보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 내 감정이나 욕구를 부인해야 한다면, 즉 나라는 사람을 부인해야 한다면 그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로저스는 '당신이 느끼는 감정과 욕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옳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잃어버렸던 감정 및 욕구를 찾아서 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 것이 상담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죠.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구분지을 수야 있겠지만, 감정이나 욕구 자체는 무조건 옳다는 것을 언어적 및 비언어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런 강조의 과정이 상담 장면에서 지속됨으로써 내담자는 보다 통합된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동생놈이 미워 죽겠는데 그 감정을 부인해야 한다면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클까요. 의존성을 부인한 채 독립적이고 주도적이고 믿음직한 맏형, 맏언니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일까요.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이 지속되면 결국 탈이 나게 돼 있습니다. 미움의 감정을 부인한다고 그게 사라지겠습니까.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어떤 다른 미운놈(예, 직장상사)에게 폭발적으로 분출될 수 있습니다. 의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서 가정 경제와 살림과 육아까지 독박으로 하고 있던 아내에게 갑작스럽게 우울증이나 신체적인 질환이 찾아올 수 있죠. 둘 다 오거나.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되는 내적 소외의 과정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일상의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워킹맘들의 분노가 핫이슈 중 하나인데요. 지금까지는 출산이 경력단절의 서막이었습니다. 애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 두거나 육아 휴직 후 복직했을 때 동일한 일을 함에도 출산 전에 비해 깎인 연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다른 엄마들도 다 비슷한 처지인 것 같으니 화가 난들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신이 이 조직 안에서 혹은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려면 직장인으로서의 당신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엄마로서의 삶을 강요 받았다는 것이죠.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은 이런 내적 소외에 맞서는 분위기입니다. 나는 엄마일 뿐만 아니라 직장인이기도 하다는 사회적인 발언이 시작된 것이죠. 이전에는 자기인식과 실제 경험의 괴리에서 오는 위협감을 부인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괴리를 좁혀야 한다는 신호로서 위협을 받아들여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조건에 분노하며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상담의 과정은 이처럼 주관적인 현실(직장인이자 엄마인 나, 동생이 미운 나)과 외부 현실(엄마이지만 직장인은 못 되는 나, 동생이 밉지만 동생을 미워하면 안 되는 나) 간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고, 주관적인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주관적 현실의 부인이나 억압으로 인해 야기된 다양한 문제들을 해소하는 과정일 수 있겠습니다. 내적 소외를 감소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상담의 기술(3판, 주은선 역) 4장 [탐색 단계의 개관]을 참고하여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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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감사합니다

인명사전 수동으로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렇게 찾아와서 덧글도 달아주시고 감사드립니다.

상담을 하시는 분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임상심리 전문가 분이셨네요! 어쩐지! ^_^

직접적인 상담만큼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어느 정도 제 이야기라 더 와 닿는거 같네요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 글은 상담이 필요한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내적소외의 해결은 이젠 거의 모든 상담과 심리치료의 기본이지요. 전 대상관계이론에서 말하는 자아이미지의 통합이 생각나네요. TCI 성격척도의 자율성도요.

네 서로 다른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 같은 얘기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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