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몸' 사건
1957년 8월 30일 귀하신 몸 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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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8월 말 태풍이 휩쓸고 간 뒤의 폐허를 수습하느라 군관민이 안간힘을 쓰던 8월 30일. 경주 경찰서장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젊은 목소리의 한 마디에 서장은 그만 혼이 빠지고 만다. "아 나 이강석인데....."
경찰서장은 득달같이 지프를 대령하여 젊은이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다방으로 달려간다. 그 다방에는 잔뜩 멋을 낸 청년 하나가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경찰서장 코는 즉시로 땅에 닿는다. "하아 어찌 귀하신 몸께서 홀로 오셨나이까." 그 대답은 근엄했다. "하계 휴가차 진해에 계시는 아버님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소. 암행시찰이니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되오. 아버님께서 누설자는 엄중히 다스린다고 말씀하셨소. 수재민에게 나누어 줄 쌀과 돈을 준비해야겠는데."
'귀하신 몸' 이강석은 부통령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아들로서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됐다. '애국지사의 아들'이라 하여 서울 법대에 입학특례로 들어갔으나 도저히 그 친구를 동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서울 법대생들의 동맹휴학에 부딪쳐 좌절된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육사 16기로 입교는 했지만 관절염을 앓아 그만두고는 속성 장교 육성 코스였던 갑종 장교로 이른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 뒤 원래의 동기들이 아직 육사 3학년일 때 육군본부로 와서는 육사 12기들과 함께 소위 생활을 했던 파격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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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닿았던 코를 겨우 거둬들인 경찰서장은 즉시 '귀하신 몸'을 경주 최고의 호텔로 모셨고 다음날 모든 일정을 작파하고 귀하신 몸의 경주 나들이에 동참한다. 경주에서 질탕하게 놀아붙이고 경찰서장과 기념사진까지 찍은 뒤 영천으로 옮긴 이강석은 영천경찰서장의 영접을 받은 후 경무과장이 지휘하는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동으로 간다. 안동에는 소식을 듣고 지역 유지들이 운집해 있었다. 귀하신 몸이 풍수해를 살피러 왔다는 말이 전해지자 46만환이라는 거액도 삽시간에 마련되었다. 길 가는 도중에는 인근 부대 36사단 사단장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허허 내가 이강석 소위 육사 있을 때 교장이었는데...... 그냥 가면 쓰나."
공석 중인 중앙 부처의 기관장 자리를 은근히 청탁하는 이도 있었고, "이번 민의원 선거에서는 이 한 몸 초개와 같이 바쳐" 자유당 당선에 힘쓰겠다는 기염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그 방 앞에서 불침번을 선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귀하신 몸의 고귀함은 대구에 이르러 도지사 관저에 여장을 풀었을 때, 이강석의 얼굴을 아는데다 아들이 이강석의 동기동창이었던 도지사 이근식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난다. "얘는 이강석이 아니야. 너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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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몸'은 이강석은 커녕 이름 하나 같지 않은 강성병이라는 청년이었다. 대학 입시에 떨어진 후 빌빌매고 다니던 그가 이강석 행세를 하고 다녔고 대여섯 고을의 경찰서장과 시장, 군수, 유지들이 죄다 속아넘어간 것이다. 경찰은 당연히 이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쟁쟁한 야당지였던 대구매일신문 기자가 들추어 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진다.
무려 1천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판사의 전용문까지 인파가 들어차서 입장하는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는 참사가 벌어진 공판에서 나이 스물 둘의 청년 강성병은 울분에 찬 항변을 내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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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한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입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한번 흉내내 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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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행장은 다분히 50년대적이다. 전주 이씨 대통령은 사실상 자신을 왕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군 위계 질서 따위는 깡그리 없는 것으로 하고 육사 16기 장교인 그 양자를 12기 선배들 틈에 밀어 넣었던 때였다. 그 시대적 분위기에 더하여, 또 하나 강성병의 행각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일종의 '벌거숭이 임금님'같은 그릇된 믿음의 힘이다.
덜떨어진 경주 경찰서장이 갑작스레 나타난 귀하신 몸에게 속아 넘어간 순간부터 그 믿음은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경주경찰서장이 그렇게 했는데 영천경찰서장이 의심을 품을 수 없었고, 안동의 유지들은 귀하신 몸의 거마비를 마련하는데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다. 심지어 이강석이 육사 다니던 시절 육사 교장이었다는 사단장도 그 믿음에 동참했다.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임금님의 옷처럼, 그들 눈 앞의 귀하신 몸은 이강석이었고 이강석이어야 했으며, 이강석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 믿음 위에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이강석은 4.19 후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했는데 3년 뒤 강성병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저승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형편이 무인지경이던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꼬락서니의 정점에 섰던 두 젊은이는.
죽으려면 혼자 죽지 가족들을 죽이다니... 그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죄길래...
아 그 가족이 이기붕 가족입니다.... 4.19 이후 세상을 볼 일이 막막했을 집이죠
지금도 반복되는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자한당이 나 법사위원장이야 하며
강원랜드에 청탁한것 처럼......
맞습니다... 그 고리 참 끊기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