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2월 1일
1019(고려 현종10)년 강감찬 귀주대첩 승리
1018년 12월,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은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당시 강감찬은 기병 1만 2,000명을 미리 주변 산골짜기 안에 매복시켜 놓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삼교천 물을 막고 기다리다가 적이 삼교천을 건널 때, 막아 두었던 물을 터놓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을 일으켜 거란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첫 전투에서부터 기세가 꺾인 거란군은 아예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직행하기 위해 계속 남하했다.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을 비롯해 1만 명의 군사를 개경으로 보내는 등 개경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야율호덕(耶律好德)을 사신으로 보내 개경 외성(外城)의 통덕문(通德門)에서 거란군이 회군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알리고는, 고려군 100명이 금교역(金郊驛, 황해 금천) 일대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거란의 척후병들을 야간에 습격해 모두 죽였다.
압록강을 건넌 뒤 고려군에게 잇따라 패배하며 탈진한 거란군은 마침내 개경 진격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야 했다. 곳곳에 고려군을 매복해 퇴각하는 거란군을 기습하도록 했다. 거란군 1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지휘관인 소배압(蕭排押)을 포함해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 거란의 성종이 대노하여 소배압을 파면해 관직에서 쫓아냈다.
1919년 무오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1919년 2월에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3·1 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 위해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라고도 한다.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였고 당시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하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이며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1919년 2월 (또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사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여, 별칭으로 '무오독립선언' 또는 '길림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오독립선언 직후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서 작성 이후 예관 신규식은 동제사 요원들로서, 곽경,선우혁 등을 국내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월1일 독립혁명의 거사에 참여하도록 밀서 등을 통하여 동참을 요청 하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당시 한성에서 손병희 등 종교인 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이전에 동경에서 2.8 학생 독립선언을 한 600여명의 학생들 중에서 약390여 명이 일시에 귀국하여 각자의 고향에서 3.12독립혁명을 일으켰다.
1955년 만화 ‘고바우’ 연재 시작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유머만을 연재했지만 점차 독자들의 기호에 맞춰 시사문제에도 관여하면서 시사만화로 발전해갔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 11월, 대구 지방지였던 만화신보에서 첫선을 보였다.
작가는 1년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15회 연재하면서 시사만화가로 데뷔한 18살의 소년 김성환이었다.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경무대 똥통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필화 사건이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빗댄 당시의 고바우 내용으로 김성환은 문초를 당하고 과료를 물었다.5·16 이후에도 군사정권을 풍자하던 고바우 때문에 김성환은 1963년 봄부터 8개월간 붓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환의 가장 큰 시련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계 숙정 33명에 포함돼 폐업을 선언하고 정든 지면을 떠난 것이다.
그 해 9월 11일부터 조선일보에 새롭게 자리잡은 김성환은 1992년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직 할 때까지 조선일보에 고바우를 연재하다가 이후 문화일보로 옮겨 2000년 9월 29일까지 고바우를 이어나갔다. 고바우 영감은 그동안 1만 4,139회 연재되어 일간신문에 연재된 단일 작가의 4컷 시사만화로 세계 최장의 기록을 세웠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기공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민족번영 간선대동맥이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총공사비 42,973백만 원을 투입하여 만 2년 5개월만 인1970년 6월 30일에 완공하여 7월 7일에 개통 하였다.
조국의 산하를 남북으로 뚫고 뻗은 장장천릿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우리의 재력과 기술로 완성한 역사적인 과업이었다. 오늘의 이러한 빛나는 성과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감에 입각한 박대통령각하의 착상과 집념의 결정이며 아울러 우리 온 겨레의 억센 의지의 점철이요 승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010년 고창·부안갯벌 람사르습지 등록
국토해양부(장관:정종환)는 전라북도 고창·부안갯벌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로 인정받아 2월 1일 람사르 습지로 새로 지정·등록되었다고 밝혔다. 람사르 협약에서는 자연상태의 희귀하고 독특한 유형을 가지고 있거나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람사르 습지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고창·부안갯벌은 전라북도 고창군과 부안군의 사이에 있는 곰소만에 위치한 반폐쇄적인 내만형 갯벌로서 인근에 위치한 새만금 갯벌이 사라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으며, 펄갯벌, 혼합갯벌 및 모래갯벌이 조화롭게 분포되어 다양한 저서동물과 염생식물이 서식하고 있고, 흰물떼새, 검은머리물떼새, 민물도요, 큰고니 등과 같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의 서식처로 이용되는 등 보전가치가 뛰어나다.
국토해양부는 고창갯벌에 인접하여 있는 폐양식장·폐염전 0.79㎢를 갯벌로 복원하는 사업을 올해 착공할 계획이며, 앞으로 고창·부안갯벌에 대한 보전 및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갯벌의 가치를 증대함은 물론 생태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계획이다.
561(신라 진흥왕22)년 경남 창녕에 척경비 세움
1919년 김동인 주요한 등 도쿄에서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 창간
1962년 동전투입식 공중전화기 처음 설치
1987년 한방의료보험 온나라 확대 실시
1992년 행정기관과 정부투자기관의 업무용 및 자가용 차량 10부제 운행
2017년 보건복지부 삼성서울병원에 메르스사태 확산 책임물어 과징금806만원 물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