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우월한 두뇌란 무엇인가 - 과잉기억은 초월적 능력이 아니다

in #kr-science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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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기억은 창작자에게 좋은 소재입니다. 지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창작자 자신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를 묘사하기 어렵다는 것에서 옵니다. 하지만 '모든 걸 기억한다'는 능력은 묘사가 한층 수월합니다. 이는 수용자들에게도 매력적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능력과 그러한 능력을 지닌 이를 이해하는건 어렵지만 단순히 모든 걸 기억하는 인물을 이해하는건 수월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지성이란 무얼 상징합니까? 단순히 많은 것을 기억하는게 뛰어난 지성의 상징은 아닙니다. 지성이란 기억의 응용입니다.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하는 능력이 바로 지성입니다. 지금부터 기억과 지성 간의 간극을 쉽게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학습과정에서 암기능력을 동원한 적이 많을 겁니다. 한글, 알파벳, 구구단을 외워야 했으며 단어, 한자, 영단어 등도 외워야 합니다. 한번 그 기억을 살려봅시다. 암기한 기억은 순서를 토대로 꺼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알파벳을 처음 외울 때 J 다음이 무엇이냐 물으면 A부터 J까지 암송한 후에야 K를 꺼낼 수 있었을 겁니다. 단어 암기 시험을 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영어 단어를 500개씩 외우는 시험을 본 적 있는데 당연히 정상적으로 단어를 이해하며 외워서는 통과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에서 단어의 순서는 섞지 않았고 학생들은 그 순서를 외웠습니다. 무작위로 단어를 제시하고 뜻과 매치하도록 하면 250개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지만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국어 시간에 시 4개를 외우고 백지에 행과 연을 정확하게 옮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순서를 토대로 외웠습니다.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것도 역순으로 하면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기억력과 지성이 다르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절대로 기억이 곧 지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는 특정 인물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 받은 질 프라이스(Jill Price)의 사례를 볼까요? 질 프라이스는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두 상세히 기억합니다. 음식의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를 처음 맡았던 순간을 모조리 기억합니다. 날짜, 요일, 어떤 가게, 동행, 입었던 옷, 그 날 있었던 사건까지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양한 부작용도 겪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뉴런 간의 연결인 기억이 약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결국 시냅스의 형성입니다. 같이 자극되었던 다양한 뉴런들이 계속해서 연합하여 발화합니다. 현상을 보았을 때는 기억과 지성을 분리하기 쉬웠지만, 뇌 속으로 들어오면 다시 이것이 힘들어집니다. 지성 또한 시냅스의 형성이기 때문입니다. 영감이라는 것도 결국 시냅스의 연합 발화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시냅스의 연결이 견고한 과잉기억 증후군을 지닌 이들은 진정 초월적 능력을 지닌게 아닐까요?

이 의문을 풀기에 앞서 망각의 가치를 살펴볼까요. 존 왓슨(John Watson)의 공포실험에 대해 잠깐 다루어보겠습니다. 존 왓슨은 알버트라는 생후 9개월 된 유아에게 흰 쥐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알버트가 그 쥐를 만지려고 할 때마다 큰 소음을 내었습니다. 알버트는 소음이라는 부정적 자극과 흰 쥐를 연합하여 기억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흰색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흰색 털을 가진 동물부터 흰 수염을 가진 산타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래토록 계란을 먹지 못 했습니다. 유치원에서 계란을 먹고 크게 체한 적이 있어 그 후로 계란의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했습니다. 지금은 이를 이겨내고 계란을 먹고 있으나 알러지가 있는 것도 아닌 음식을 10년이나 멀리한 것은 긍정적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처럼 단순한 트라우마부터 복합적인 트라우마까지 이릅니다.

망각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 기억을 안고 가는 건 정신에 큰 부담을 줍니다. 시냅스 간의 연결이 견고하다는 건 트라우마의 확대입니다. 만약 시냅스 형성이 훨씬 견고했다면 계란에 대한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유치원, 계란을 먹었던 요일, 계란을 담은 그릇의 형태, 색깔까지도 트라우마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과잉기억을 지닌 질 프라이스가 겪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시냅스 간의 연결이 지나치게 견고하여 그녀는 아무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기억할 뿐 아니라 그 기억이 퇴색되지도 않습니다. 퇴색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사건과 정서적 반응의 연결 또한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상술했듯 저는 유치원을 다닐 때 있었던 계란에 대한 일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치원을 다닐 때 있었던 모든 일화를 기억하는게 아닌만큼 이 기억이 훨씬 오래 남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계란과 부정적 정서에 대한 연결이 약해졌습니다. 계란은 일상에서 정말로 많이 쓰이는 소재입니다. 빵, 국, 김밥 등 계란이 포함된 요리는 끝이 없습니다. 계란 향이 비교적 약한 음식을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기억들도 쌓여가며 계란과 부정적 정서의 결합은 약해집니다. 결국에는 계란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겨냈습니다. 저는 방금도 계란이 들어간 토스트를 먹었습니다. 과잉기억 증후군을 가졌다면 있을 수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과잉기억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 곧 사고력이라는 오해에서 시작된 환상입니다. 단순히 많은걸 기억하는게 사고력이라면 인간의 두뇌는 진작 컴퓨터에게 추월당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두뇌는 아직까지 컴퓨터보다 훨씬 우월한 도구입니다.


쓰고 보니 오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저히 모를 글입니다. 아무 말 대잔치가 내 색깔인가 봅니다. 아무튼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고 어두운 걸 보니 계절의 변화가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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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과잉기억증후군이란 것이 있군요. 너무 힘들것 같아요..

본문에서 언급한 질 프라이스는 자서전도 있습니다. 기억에 대한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해 받고 있다는 느낌을 연구자들에게 처음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정말 슬픈 일이지요.

The Woman Who Can't Forget 이란 책이군요. ^^ 지금 막 찾아보고 있어요 . 감사합니다~

과잉기억증후군 오늘 또 하나 배워갑니다.

글이 중구난방이라 죄송합니다. 더 깔끔하게 쓸 수 있었을텐데요.

흐름대로 쭉써내려가서 그러신건가요? 이게 중구난방이라면 저는... ㅜㅜ

루시 관련 글 엄청 잘 쓰셨잖아요 ㅎㅎ 뇌의 활용도라는 미신에서 잠재력이라는 지향점을 끌어내셨지요.

억... 교수님 칭찬 감사합니다. 꿈보다 해몽이군요!

저도 회를 먹고 아직까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 이제는 새벽 5시 넘어도 깜깜하네요......

어느덧 정말 밝아졌네요. 정리하고 나가서 일출이나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안 주무신건가요? 피곤하시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오늘은 푹 쉬시길 바랍니다.

글을 읽자마자 전민희 작가의 룬의 아이들 데모닉의 주인공이 떠올랐습니다. 윈터러는 좋아하지만 데모닉은 좀 그닥이었데 그 이유중 하나가 세기의 천재라는 설정을 가진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빈약해서였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박한 기억력을 가졌다는게 천재성에 대한 묘사의 거의 대부분이라 몰입이 잘 안되더군요. kmlee 님 말대로 기억력=지능 이 아닌데 말이죠.

자신보다 통찰력 있는 이를 묘사하는게 어려우니 기억력, 관찰력에 한정 짓는 것 같습니다.

지식과 사고력이 다르다는 말씀은 백번 동감입니다. 사고력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아이들의 사고력은 어떻게 키워주어야 하나 항상 고민합니다...

경험과 지식의 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도 자신의 한정된 지식에 갇히곤 하니까요.

이렇게 고급진(?) 아무말 대잔치가 있을 수 있군요. :)
어떤 것은 잊혀져서 괴로운데, 어떤 건 잊히지 않아서 괴롭죠. 말씀하신 대로 망각이라는 게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잉기억증후군은 사진찍듯 기억하는 능력과는 다른 거겠죠? 예를 들어 그날 어떤 색 스카프를 했냐고 물어보면 사진을 꺼내서 자세히 살펴보듯, 기억을 다시 꺼내(?) 살펴보는 사람에 대한 영상을 봤었거든요. 바로 기억해내진 못해도, 사진처럼 기억된 장면을 머리속에서 꺼내서 살펴보면 기억해내더라고요.

본문에서 묘사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를 다 기억합니다. 사실 포토그래픽 메모리는 허구고 훈련을 통해 암기법을 지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방송, 자서전 등을 통해 유명세를 얻어 돈을 버는게 목적이구요.

특히 뇌기능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많이 갖는 능력입니다. 만약 부작용 없이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이들이 노벨상을 휩쓸었겠죠.

측두엽에 자기장을 걸어 뇌기능을 제한하면 말씀하신 초기억력 현상(서번트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하더라구요.
기억력과 지성은 말쓴하신대로 별개의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예. 다음에 자폐성 서번트 아동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볼게요.

아이의 생후 5~6까지의 기억이 잊혀지는 것과 관련이 있겠네요. 기억과 지성이 같지 않은것도 명백한 사실 같아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머리가 좋을 수는 있지만 지성있는 사람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

엄청난 암기력을 지닌 사람들이 오히려 지능이 낮고 일상 생활조차도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우뇌에 손상이 있는 경우도 많구요.

두뇌는 쓰는만큼 발달하고 진화한다는 말이 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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