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발터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사진의 작은 역사 외

in #walterbenjamin3 years ago

p.45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원작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을 이루며, 이 진품성에 바로 그 대상이 오늘날까지 그것 자체이자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는 정체성을 면면히 전해준 어떤 전통에 대한 관념이 기반을 둔다.'

라이브 연주에서 발견하는 가치와 관련하여.

미술품과 달리 녹음을 통하여 동일한 질(quality)로 유통되는 음악에는 진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가 직접 제작한 작품은 오직 하나의 물리적이자 실질적인 개수로 남지만, 음악가의 실연은 시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원할 때마다 우리의 시간에 멜로디와 리듬, 화성이 뒤섞여 있는 재화적 성격의 시간을 덮어쓸 수 있다.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여기’와 ‘지금’ 중, 음악은 언제나 ‘지금’을 가지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대신, ‘여기’라는 공간적 요소는 약화되는데(레코딩 이전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오직 실연이 음악을 감상하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여기’와 ‘지금’ 두 가지 요소의 충족이 가능했다), 이를 보충해 아우라에 근접하고 싶다면, 라이브를 체험해야 한다. 단 한 번, 이전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일회적 사건으로서의 즉흥연주가 공연장에 있다. 그곳은 존재했다가 사라져 버리는 아우라를 느끼기에 적합하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우라일 수 없다. 관람객이 음악을 듣는 동안 연주자는 그만의 방식으로 실존을 체험한다. 연주할 때 느끼는 쾌감과 해방감, 자유로움은 오로지 연주할 때만 존재할 뿐 언제나 불러낼 수 없는 체험이다. 연주자는 실연의 과정 속에서 상실과 충만을 동시에 느끼며 움직이는 동안 아주 먼 나라에 가기도, 극단적인 내면의 영역으로 침잠하기도 한다. 그 체험의 강력함이 실제로는 좋은 연주를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나쁜 연주를 좋다고 느끼도록 착각하게 만들게도 한다. 결과에 대한 인지와 평가에서 분리된 영역이야말로 아우라의 영토이다.

재즈 연주자의 라이브는 실시간으로 실행될 수 있게 준비된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에서 삐끗하여 넘어지는 상태에 놓여있다. 이 상태는 의도되거나 회피하지 않는 상태이다. 재즈 연주자의 즉흥연주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고, 연주자 그 스스로도 그 가능성에 대해 낮게 평가한다(이것은 공연장에서 벌어지는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브 무대가 레코딩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애초에 레코딩을 염두에 두고 벌어지는 라이브는 배제된다). 무엇보다 즉흥연주자는 다른 요소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술품에서는 불가능한 원작의 분석이 재즈 연주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게 된다. 미술작품은 시간과 재료와 작가의 노력이 ‘통합된’ 존재로서 한 번에 시야에 들어오는 반면, 음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논리적으로 발전과 변형을 거듭하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은 그림과 달리 한 번에 전체적인 얼개를 파악하기 어렵다. 재즈 연주에서 분석은 연주자의 연주법, 테크닉, 화성적 접근, 구성과 즉흥연주에서의 완성도에 집중되며, 이러한 분석이 가능하려면 분석의 주체가 음악적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음과 리듬을 채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연주한다고 해서 진품성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재즈 연주에서 진품성을 이루는 것은 연주자의 집중과 역량이다.

p.86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아직 충족되기에는 때 이른 어떤 수요를 창출해 내는 일이었다.'-발터 벤야민

'예술작품은 미래에 대한 반향들로 전율을 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앙드레 브르통

재즈가 품고 있는 미래에 관하여.

재즈는 그 발전과정에 있어 줄곧 변화를 강인한 생명력의 원천으로 삼아온 음악이다. 스윙에서 비밥으로의 변화, 하드밥과 쿨재즈로의 세포 분열, 클래시컬 음악을 통한 밀도 강화, 라틴음악, 펑크와 락을 접목시킨 경계의 확장, 순수성에 대한 비난은 차치하더라도, 팝과의 조우, 샘플링과 힙합, 신서사이저와 전기악기, 전자악기를 가리지 않고 껴안는 포용력까지. 재즈는 닥치는 대로 삼켰지만 그 포식이 결코 든든한 지지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재즈를 듣는 이들은 소수였고,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의 재즈 음악가들 스스로가 그러한 변화와 통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진취적인 이들은 그런 상황과 공존하며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전념해왔다. 그중에 몇몇 경우가 일시적인 유행에 편승하는 인기영합주의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충족되기에는 때 이른 수요를 창출해 내는 일. 그것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면, 재즈는 늘 가장 중요한 일을 해오는 중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진취성은 미래로 정향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근본적 가치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미래와 소통한다. 틀린 음이란 없고 각각의 음악적 구성요소는 각각의 미래를 품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 중 단 하나만을 듣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재즈를 생각할 때에 전율하는 과정이다. 아직 닿지 못한 가능성들이 시간의 은하수 아래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p.89

'..그러나 영사막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그 장면의 변화로 인해 이내 중단되고 만다.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로 이러한 데에 그 근거를 두며, 또 이러한 충격효과는 다른 충격효과가 모두 그러한 것처럼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만 받아낼 수 있다. 영화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증대된 삶의 위험에 상응하는 예술형식이다.'

증발된 집중에 관하여.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쉴 새 없이 전환하는 화면이 통제한다는 분석에 근거한다. 바라보는 이는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없고 굳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대신, 장면이 이어지는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을 시각적인 집중이라고 부르겠다. 이러한 종류의 시각적 집중은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데, 바라보는 이가 스스로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그림을 어느 정도의 속도로 훑어낼 것인지, 시선을 시작하는 지점이 왼쪽 하단인지 오른쪽 상단인지, 중심인지 정하는 것은 바라보는 이의 사고와 취향, 판단, 교육받은 바에 의하며, 이렇게 세심한 조율은 미술관의 폐장이 임박하거나 바라보는 이의 스케줄이 촉박하지 않는 한 쉽게 어그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시간의 통제가 철저히 실연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특징으로 인해 영화 못지않은 집중, 그러나 시각이 아닌 청각적 집중이 필요하다. 장르가 무엇이든 이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술복제로 인해 음원의 무한한 복제가 가능해진 지금의 시대에는 이러한 청각적 집중이 덜 필요해졌으며, 드물어졌다. 놓친 부분이 있다면 반복해서 들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복된 음악을 한층 향상된 집중으로 감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저 아까 들은 부분을 놓치는 대신 아까 놓친 부분을 들을 뿐. 이러한 반복 가능성은 한 곡을 감상하는 청자의 태도를 덜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여하간,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해 청각적 집중은 음원의 재생보다 라이브에서 살아남을 자리를 찾게 된다.

벤야민이 지적한 부분 중 ‘영화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증대된 삶의 위험에 상응하는 예술형식’이란 대목을 살펴보면, 한편 재즈는 어떠한가 생각하게 된다. 재즈의 복잡한 형식과 리듬, 날이 갈수록 고도화되는 즉흥연주에서의 테크닉과 개념(또는 conception의 inception)은 다면화가 극도로 심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재즈는 영화에 비해 선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일까. 청각이 시각에 비해 덜 자극적인 감각이기 때문일까. 영화의 그것보다 재즈(사실 현대음악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의 복잡성이 훨씬 심각하기 때문일까. 더 이상 사고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버겁기 때문일까.

p.169

' ..그들에게 "사진의 현상"이 아직 "커다란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면, 어쩌면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 자체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이미지를 그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장치 앞에 서 있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라도 그렇다.'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와 ecm의 커버, 그리고 음악이 밝히는 무의식적 세계에 관하여.

사진이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젖혀 열어 보여준다면,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혹은 어떤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가라고 묻는 것도 가능할 테다. 어쩌면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가 청각적 세계로 가는 문을 대신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앨범 커버로 유명한, 실은 음악 때문에 더 유명한 재즈 레이블 ecm은 특유의 신비한 사진들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ecm의 음악과 커버에 대한 전시회가 우리나라에서 2회 열렸으며 적지 않은 관객이 장소를 찾아 음악과 이미지의 결합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모색하기도 한 바, 나는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 세계가 음악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미 앨범 커버가 중요했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재즈 애호가들은 ecm 이 만들어내는 청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ecm의 앨범 커버는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장면을 순간 포착한 것, 형태를 파악할 수 없고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나 파동의 움직임, 아티스트의 얼굴 그 자체, 극히 정적인 자연의 풍경, 추상화 그 자체인 것 등 공통의 요소를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음악을 듣는 이는 이러한 다양성 속에 어떤 공통적인 느낌을 발견한다. 또 다른 재즈 레이블인 블루노트나 액트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정체성이 그 이미지 속에 숨어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ecm의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만나 굳건한 영역을 형성한다.

차갑고 이지적이며 실험적인 음악이 주된 레퍼토리가 되는 ecm 레이블의 라인업은 듣는 이에게 고된 집중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집중이 없다면 그들의 음악은 쉽게 정수를 찾아내기 힘들다. 이를 돕는 것이 ecm의 커버다. 앞의 말을 빌리자면, 청각적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매니저 역할로서의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 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표현할 수 없는 청각적 세계를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그들이 돕는다. 음악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그 안에 숨어있고, 그들의 의도가 있는 방향으로 정향하도록 이끄는 촉매가 그 안에 들어있다. 어쩌면 우리가 ecm 커버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열쇠로서 기능하는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의 이야기를 비틀어 얘기하자면, ecm의 커버는 ‘음악 자체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들리는 청각적 세계의 이미지를 짧은 시간 안에 전달하는 장치’ 이겠다.

p.185

'..바로 그러한 성과물들 속에서 초현실주의적 사진이 세계와 인간 사이의 유익한 소외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한 소외는 세부 내용을 밝혀내기 위해 모든 은밀한 것들이 제거되는 장을 정치적으로 훈련된 시각에 열어 보여준다.'

유익한 소외에 관하여

상업사진(상업이라는 말에 은근히 들러붙은 ‘순수성의 결여’를 강조하고 싶지 않다.)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미지다. 우리는 매번 다른 스타일의 상업사진을 접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느낀다. 이것은 색이나 구도, 메시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말끔하게 거세된 무엇인가를 느끼는 동시에 새롭게 달라붙은 무엇인가를 느낀다. 이것은 우리를 훌륭하게 지어진 인공양식장 안의 물고기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상업사진의 인공적 밀림 속에서 아제의 소외된 사진은 고요한 오두막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 오두막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새소리와 플라스틱 잎사귀가 빚어내는 소음으로부터 고요하다. 안정을 제공하는 소외, 잊혀가는 것들을 어둠으로부터 건져내는 소외.

누군가가 나에게 음악에도 그런 종류의 소외가 있냐고 묻는다면, 자유 즉흥(free improvisation)을 수면 아래에서 건져내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여주고 싶다. 만연하는 상투적 클리셰, 오랜 시간을 통해 고난에 가까운 훈련으로 쌓아놓은 전통의 어법, 안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담보할 수 있는 보편적 진행을 의도적으로 떨쳐 버리려는 몸부림. 그런 은밀한 카르텔이 제거되는 장으로서의 자유 즉흥연주가 있다. 오로지 음과 리듬, 마음의 심연에서 건져내는 화성의 순간적 발상에 영원할 것 같은 의지로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각오. 인공의 밀림 속에 그 오두막은 홀로 천연의 것이다.

p. 189

'결과적으로 기계적인 복제 방식들은 일종의 축소 기술인 셈이고 또 그 기술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작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러지 않고서는 그 작품들은 전혀 이용될 수 없게 된다.'

기계적 복제방식-레코딩 역시 음악의 축소 기술인가?에 관하여

음악의 역사에서 레코딩이 시작된 이후의 시간은 이전의 시간보다 짧다. 그것도 아주 많이. 레코딩이 없던 때의 사람들은 음악을 어떻게 즐겼을까. 오로지 실연의 감상뿐이었다. 교회나 성당에 가서 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듣고 따라 하거나, 마을의 광장이나 공원에서 연주하는 작은 순회연주단, 운이 좋다면 오케스트라의 실연이 레코딩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음악을 향유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코딩이 시작되면서부터 음악은 더 이상 음악가들만의 것이 되는 것을 멈추었다. 사진이 미술작품들을 찍었던 것처럼 레코딩은 음악가들의 노래와 연주들을 찍어냈다. 녹음이 담긴 판을 대량생산해낼 수 있는 생산력과 그 녹음을 물리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기술력이 생겨나면서부터 음악은 산업이 되었고 권한은 자본가들에게 양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차지한 시대에, 기계적 복제 방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을 손쉽게 이용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일견 지극히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기계적 복제 방식은 사람들이 음악을 이용하는 대신 무시하기 손쉽게 만들었다. 무한 반복의 가능성 때문이다. 음악은 더 이상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 사건이 되었다. 인간은 예술작품을 지배하기 위해 대상의 성격을 일회성 대신 일시성으로 변경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될수록 인간은 예술작품을 무시하게 됐다. 이것은 소유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콤팩트화인가, 비가치화인가.

만약 비가치화에 역점을 둔다면 이런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손쉽게 음악을 접하여 그들이 원하는 상황 속에서 재생 버튼만 누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행복에 가까운 사실이다. 레코딩이 시작된 이후 인간은 거의 최대치의 능력을 사용하여 최대치에 가까운 다양한 음악을 생산 중이며 소비 중이다. 양이 질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광범위한 장르 속 막대한 음악이 서로 만나 섞이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봄날의 가지가 그러하듯 수만 가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것은, 과연 비가치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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