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깐수 그리고 정수일

in #zzan7 years ago

1996년 7월 22일 무하마드 깐수 그리고 정수일

1996년 7월 22일 프레스센터 20층은 기자들의 발길로 분주했다. 안기부가 득의양양하게 발표한 고정간첩 '무하마드 깐수'의 간첩 활동 증거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서 처용을 신라에 온 아랍인으로 풀이한 "신라서역교류사" 등 정력적인 연구 활동을 벌이던 필리핀 국적의 깐수가 간첩이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완연한 외국인으로 보이던 그가 순수 혈통의 한국 사람 (조선 사람) 정수일이었으며, 부인조차도 그를 필리핀 사람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만큼 철저하게 주변을 속여 왔다는 데에서 기절초풍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력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입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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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었던 수많은 조선 유민의 2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에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중국 10억 인구 중에서 수재만 들어간다는 베이징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중국 외교부장 탕자쉬안이 그의 동기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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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 유학생 1호로서 이집트에 유학했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언어적 천재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평생 동안 동양 언어 일곱 가지 즉 한국어,일본어,중국어,아랍어,페르시아어,말레이어,타갈로그어를 배웠고 서양 언어 5종 즉 러시아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스파니아어를 익혔고 티베트, 위구르 등 중앙아시아의 고대어까지 섭렵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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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중국 외교관으로 일했지만 정수일은 중국인으로 살기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은래 가문에서 배필을 소개하며 중국인으로 살아가라고 권했지만 그의 대답은 또렷했다.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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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선택한 조국은 그에게 또 다른 형태의 충성을 요구했다. 남이나 북이나 체제 대결의 치졸함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냉전 시절, 12개 나라 말에 능통한 언어적 재능과 학문적 소양까지 갖춘 천재를 북한은 대남 공작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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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조국은 그에게 스파이가 될 것을 명했고 정수일은 그를 충실히 받아들인다. 그는 여러 번에 걸친 국적 세탁 끝에 필리핀인으로서 동서문화사 교류를 전공한 교환교수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정보를 수집하여 북한으로 올려보내고 공작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성과는 높아가기만 했다. 그가 체포되자 "죄는 미우나 그로 하여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탄원까지 등장할 만큼 동서 교류 문화사에서 그의 입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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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학자인 그였으되 예순을 넘은 이순의 나이에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조국 앞에 비굴하지 않았다. 필리핀 국적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국외 추방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는 일단 출입국 관리법, 그리고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는 곳에 갇힌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썼던 외국 억양의 한국어를 버리고 능숙한 조선어로 말한다. 중국 외교관으로 일하지만 자신은 분명한 조선 사람임을 밝혔던 것처럼, 생애 두 번째로 자신의 조국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공표한 것이다. "내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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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택했고, 그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조국은 언어의 천재이자 둘도 없는 학자였을 한 사람을 공작원으로 만들었고, 결국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에게 충성한 한 지식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북한의 정보일꾼들은 정수일로 하여금 보안이 철저하지 못한 팩시밀리로 정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고, 결국은 이 때문에 안기부에게 꼬리가 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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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체포 직전까지 열과 성을 다해 진행하고 있던 '동서교류사' 작업이 중단되는 것을 안타까와했고, 그가 보여준 학문적 열정은 공안검사들마저 감동시켰다. 수사 과정에서 정수일의 사정을 들은 검사는 관계기관에서 정수일의 마지막 원고를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판사는 형을 언도하면서도 "정세분석 보고 이상으로 학문연구에 가치를 두었고, 이러한 피고인의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학문적 열정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며 안스러움을 표했다.

정수일은 감옥 안에서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아내가 겨우 반입해 주는 자료들과 자신의 두뇌 속에 담긴 기록들을 끄집어내며 법무부 노트에 자신의 연구를 적어 내려갔고, 5년 동안 노트 4백여 권에 이르는 집필을 해 냈다. 그 고통스런 집필 현장에서 정수일이 떠올린 것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한증탕 같은 여름철, 더덕더덕 땀띠 돋아난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하루 열댓 시간씩 뭉개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유배 생활 18년간 5백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선생은 줄곧 앉아서 너무 오래 글을 쓰다보니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썼다고 한다.” 노작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옮긴이 후기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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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역시 천재라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하늘이 내린 그 재능과 경륜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라도 땅끝에 내팽개친 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8년 동안의 귀양살이 동안 엉덩이가 짓무른 나머지 일어서서 썼던 그 방대한 저서는 끝내 현실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200년쯤 뒤 남북 분단과 냉전, 그리고 음습한 첩보전의 와중에 중죄수로 전락한 한 천재는 0.9평 독방에 갇혀 앞서 간 천재의 처절한 노력을 본받겠노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 짜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정수일은 중국에서 태어나 25년, 북한에서 15년, 해외에서 10년, 그리고 2019년 현재 35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중국의 외교관, 북한의 공작원, 남한의 교수이자 학문 연구자로 살았던 그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그가 번역한 역작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저자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모로코에서 태어나 당대의 모든 이슬람 국가와 중국, 그리고 수마트라까지 장장 12만 킬로미터의 여행을 감행하고 그를 꼼꼼히 여행기로 남겨 세계사의 값진 유산을 창조한 이다. 그에 비견될 만한 재능과 학식을 갖추었던 한 한국인 (지금 국적은 그러하므로)의 운명이 그 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에게 소중하게 간직되기를 바란다. 이븐 바투타가 그러하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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