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햅번의 마지막 사랑
5년전 '산하의 가전사'라고 해서 역사속 사랑과 전쟁 이야기를 끄적인 적이 있는데 이 중 사랑 이야기가 드디어 책이 돼 나온다....<사랑의 발명>
.
마지막 수정하는데 첫 챕터가 오드리 헵번 이야기..... 하나만 맛배기로....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사랑
세월호, 그리고 기억의 숲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건 옛날 잘 팔리던 잡지 <TV가이드>의 영화 소개란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50년대 유행하던 통 넓은 바지의 미남 그레고리 펙 옆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던 통치마 공주님의 흑백 사진 한 장. 그 사진 한 장을 본 저는 달력과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해 가며 ‘주말의 명화’를 ‘본방사수’하게 됐습니다.
.
사진으로 본 공주님보다도 영상 속 공주님은 백배 더 아름다우시더군요.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춘기 소년은 ‘공주님 앓이’를 했었습니다. 심지어 요즘에도 당신이 아는 최고의 미녀를 꼽으라는 질문을 누가 해 오면 거침없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여 까마득한 ‘아재’ 연배임을 극명하게 증거하기도 합니다.
.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출세작입니다. 전쟁 끝난 뒤 한국에 개봉해서 가난과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한국의 청춘들을 설레게 했던 영화죠. 영화 <국제시장>에서 휴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전, 이 영화 포스터가 걸린 극장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건 사실과 다릅니다. <로마의 휴일>이 1953년 만들어진 영화는 맞지만 부산에 개봉했던 건 1955년이었으니까요.
.
이 영화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오드리 헵번은 무명(無名)에 가까웠기에 포스터에는 미남 배우 그레고리 펙이 전면 배치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동을 건 사람이 그레고리 펙 자신이었다는군요. “이번 오스카상은 틀림없이 헵번이 탈 거니까 나랑 나란히 넣어 줘요.” 그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녀였지만 헵번은 그로부터 10년 전만 해도 굶어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리던 포화 속의 소녀였습니다. 나치즘을 열렬히 지지하다가 결국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린 최악의 아버지에 비하면 외가 쪽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전쟁은 헵번 가족을 갈갈이 찢어 놓았습니다. 믿고 따르던 이모부와 사촌들이 독일군에 체포돼 죽음을 당했고 어머니와 헵번은 당장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신세가 됐으니까요.
.
“처음에는 썩은 감자를 먹었죠. 그것도 없어서 풀뿌리를 캐먹었어요. 그것도 없어지자 결국 끌어안고 죽음을 기다렸죠.”
.
그래서 그녀는 독일군에게 끌려가 최후를 맞았던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을 그린 영화 출연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였겠죠. 나치를 지지한 아버지로 인한 죄책감 그리고 어떻게든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참혹한 기억의 굴레.
.
하지만 그녀는 <안네의 일기> 역을 맡아도 하등 문제가 없었을 사람입니다. 2차 대전 때 끌려가는 유태인 아이들을 보며 나치즘에 대한 분노를 키웠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연락책을 맡기도 했으니까요. 한 번은 독일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꽃다발을 건네 험악한 독일군으로부터 벗어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문득 그 독일군의 심경이 이해가 갑니다. 어린 날의 오드리 헵번 같은 소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건네고 아저씨 안녕 하고 윙크라도 한다면 간첩이 아니라 뭐라도 용서해 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
오드리 헵번이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대망의 꿈을 품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쯤, 오드리 헵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좋은 집안의 청년이었지만 그들은 연인 관계를 정리하고 친구로 남게 됩니다. 오드리 헵번이 말한 이별의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면서 똑부러집니다.
.
“내가 팬들에게 사인을 하고 있을 때 그이가 내 코트를 받아들고 있다면 그이에게 얼마나 굴욕적일까요.”
.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 이유보다는 남자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 후로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사랑은 어떤 일보다 먼저였고, 스타로서의 자존심과 그에 부합하지 않는 연인의 열등감 정도에 좌우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
오드리 헵번은 1954년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하면서 미남이자 유부남 배우 윌리엄 홀덴과의 짧고도 위험한 사랑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연예전문 작가 에드워드 Z. 엡스타인의 저서 <오드리와 빌>에 따르면 헵번은 홀덴을 ‘수호천사’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또 하나의 남우 주연이었던 험프리 보가트는 <사브리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술에 취한 채 촬영장소에 나타나 험한 말을 무시로 내뱉아 오드리 헵번을 주눅들게 헸지만 홀덴은 초보 스타 헵번을 자상하게 챙겨 주었기 때문이죠.
.
홀덴도 헵번을 두고 ‘일생 일대의 연인’이라고 했다니 둘은 꽤 열렬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윌리엄은 유부남이었지만 오드리 헵번은 개의치 않았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둘의 위험한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한 이유는 조금 뜻밖입니다. 윌리엄 홀덴은 이미 아이들이 많았고 정관 수술을 해 버린 상태였는데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오드리 헵번이 경악하여 관계를 끝냈다는 거죠 오드리 헵번에게 결혼이란 남녀의 결합일 뿐 아니라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가정의 탄생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위해 배우 은퇴까지도 고민했다는 헵번에게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소.”하는 윌리엄 홀덴의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그 큰 눈이 더 둥글게 커졌을 겁니다.
.
홀덴과의 이별 후 그녀는 운명의 첫 상대를 만나게 됩니다. 연극 <물의 요정>에 함께 출연했던 영화배우 멜 페러와 결혼한 거지요. 12살 연상의 남자였고 전성기를 살풋 벗어난 남자 배우, 그것도 세 번씩이나 결혼 이력을 지닌 저녁노을 같은 남자 배우와,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봄볕 같은 여자 배우의 결합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커플은 1956년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호흡을 맞춥니다. 러시아의 귀족 아가씨 나타샤(오드리 헵번)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멜 페러)이 우아하게 춤추는 장면은 그 경쾌한 음악 <나타샤 왈츠>와 더불어 영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지요.
.
그 환상적인 댄싱 하모니와는 달리 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그 이미지와 성격이 일치하는 부류의 여자였습니다. 이를테면 출연작 가운데 오드리 헵번이 가장 촬영을 힘겨워했던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었다지요. 고급 콜걸이었던 주인공 골리 홀라이틀리의 성격이나 생활 패턴이 오드리 헵번 자신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오드리 헵번은 청순하고 공주 같은 외모 만큼이나 사생활 역시 가지런하고 순수하기를 열망하는 쪽이었습니다. 멜 페러와의 결혼 생활 중에서도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또 많은 아이의 어머니로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는 쪽이었지만 멜 페러는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고도 한눈팔기를 멈추지 못했고 결혼 전의 바람기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더하여 그 어떤 사랑으로도 극복이 어려운 감정, 열등감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사양길의 남자 배우는 인기 절정의 배우자를 버거워할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
1968년 14년의 결혼 생활을 뒤로 하고 둘은 이혼을 선택합니다. 이후 평생 동안 오드리 헵번은 멜 페러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싫어했다고 하니 얼마나 상처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오드리 헵번의 회고를 읽으면 그 한이 뚝뚝 떨어집니다. “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면 누군가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이혼은 인생의 실패라고 여겼다. ” 물론 멜 페러의 얘기는 또 달라서 오드리가 바람을 먼저 피웠다고 주장했다고도 합니다만 저라면 오드리 헵번의 손을 번쩍 들어 주겠습니다.
.
세상 일이란 건 알 수 없고, 사람은 돌고 돌아 어떤 인연으로 눈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법이죠. 그녀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 촬영장에 방문한 한 소년과 악수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나이 14살의 귀여운 소년은 오드리 헵번과 결혼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고 하지요. 나이 스물 셋의 오드리 헵번은 폭소를 터뜨렸겠지만 말입니다.
.
그러나 이 소년은 준수한 정신과 의사가 돼 어린 시절의 스타를 정식으로 만나게 되고 마침내 1969년 오드리 헵번을 아내로 맞는 행운아가 됩니다. 한국의 축구 선수 기성용씨와 배우 한혜진씨처럼 아홉 살 차이의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었죠. 하지만 오드리 헵번 커플의 꿈은 시작부터 엇나가고 있었습니다.
.
안드레아 도티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기보다는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나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일라이자와의 사랑을 원했습니다. 즉 은막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고 호화로운 파티에서 자신의 팔짱을 끼고 나타나 자신에게 광채를 더해 주는 여신(女神)같은 존재를 꿈꾸었던 것이죠. 오드리 헵번은 오히려 아늑한 부엌에서 이탈리아인 남편을 위해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주부와 아이들에게 살뜰한 어머니로 살길 바라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아들은 이런 회고를 합니다. “학교에서 가장 질리게 들은 질문 중의 하나가 ‘네 엄마가 밥을 해 주니?’였다. 그래서 다른 집 엄마들은 밥을 안 해주는 줄 알았다.”
.
이 질문으로부터 우리는 안드레아 도티와 오드리 헵번이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안드레아 도티는 “여보! 밥!”을 외치기보다는 으리으리한 파티장에 야회복을 입고서 우아하게 비싼 스테이크를 써는 쪽을 선호했을 것이고, 뭇 신사 숙녀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아내를 원했을 테니까요. “내일 메뉴는 알레오리오 스파게티로 할까요, 토마토 소스로 할까요?” 헵번이 물으면 도티는 “왜 당신이 음식을 하나요? 요리사를 더 둘까요?”라고 대답했을 테니 스텝이 꼬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허깨비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콩깍지는 역시 허깨비처럼 흐물흐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도티 역시 열심히 다른 여자로 눈을 돌렸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지요.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옹호하며 결혼 생활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접점을 가졌다가 다른 쪽으로 뻗어나간 선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듯, 1980년 그들의 결혼 생활은 끝장나고 맙니다. 오드리 헵번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두 번째로 ‘인생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지요.
.
지구상 최소한 10억 인구 (남자들)의 가슴 속의 여신이자 연인이자 우상이었음에도 막상 그녀가 선택한 남자들이 그녀의 헌신적이기까지 한 사랑을 버거워하거나 받아내지 못한 걸 보면 (마지막 연인이었던 로버트 월더스와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신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게 됩니다. 그러나 목 놓아 바라던 행복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맡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은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그녀의 사랑을 맘껏 펼치게 됩니다.온 세상 곳곳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돕는 유니세프의 대사로 활동하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돕는 일에 나선 거지요.
.
나이 쉰을 넘은 원숙한 중년으로 헵번은 어려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던 기억을 다시금 되살렸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전문 요리사 수준의 요리를 익혔고 수녀 역을 맡으면 수녀원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는 그녀의 진지함도 한몫 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헛갈려할 만큼 화려한 배우로서의 커리어와 평범한 일상간의 간극을 평생 지니고 산 사람이었지만 그녀 스스로 결코 착각하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도 않은 채 더 많은 사랑과 행복을 향해 나아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안드레아 도티의 아들이자 헵번의 둘째 아들의 말을 들어 보시죠.
.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안에서의 어머니였다. 자라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대중들과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어머니의 이 두 가지 모습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게 내 숙제였다. 그럴수록 그 두 어머니는 같은 한 사람이라는 놀랍고도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 이 회고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녀는 아무런 사심없는 열정으로 어려움 속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이제 그녀의 이름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 재단’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억의 숲’을 조성했으니까요. 기억의 숲 조성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 첫 남편 멜 페러 사이에서 태어난 숀 페러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헌정된 후, 곧 시들어버리는 화환 대신, 우리는 추모의 나무를 심고자 합니다.살아 숨 쉬는 생명의 나무들이 마치 파수병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리 모두를 지켜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온 모든 분을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명료한 지혜를 되찾아, 더욱 성숙한 미래를 꿈꾸고자 합니다.”
.
기억의 숲에는 은행나무가 주로 심어졌다고 합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세월호의 아픈 희생을 기억하던 노란 리본처럼 샛노란 단풍이 들겠지요. 언젠가 단풍철 가족들이 다 모일 때가 오면 먼 길 마다 않고 기억의 숲으로 가 볼까 합니다.그래서 꿈꾸던 사랑을 안타깝게 이루지 못하였으나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꿈을 꾸도록 해 주었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에게 살풋 무릎 꿇고 인사를 해 보고자 합니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중학생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앤 공주님 안녕하세요.”
책이 나오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도 좋아하는 헵번을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책이 또 나오는군요. 이런 꾸준함 본받고 싶네요.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