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대토벌 작전 개시

in #zzan6 years ago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작전 개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친척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친일파였다. 전 아시아가 열강의 식민지였고 거대 중국도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스스로 근대화를 해 내고 중국 코피를 터뜨리더니 러시아까지 거꾸러뜨리는 만만찮은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한 일본을 극찬했다. 극찬은 대개 혹평을 동반한다. 루즈벨트가 혹평을 퍼부은 건 대한제국이었다. “자기를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는 약골들”이 루즈벨트가 대한제국에 붙인 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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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앞장서고 황제가 친히 나서 치르는 전면전 없이 한 나라가 맥없이 다른 나라에 먹혔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은 루즈벨트의 힐난에 사실 할 말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어나 싸운 의병들 얘기를 들으면 루즈벨트는 자신의 혹평을 거두며 모자를 벗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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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군은 별 문제가 안되었지만 그만큼 의병 활동은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데 발라내지 않으면 안될 가시였다. 특히 군대 해산 이후 정규군들까지 의병에 가세하면서 군세는 더욱 커졌고 1908년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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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병은 역시 정규군은 못되었다. 소규모 단위로 출몰하여 일본군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1907년 대장이 부친상을 당해 낙향하는 어이없는 사태 등으로 붕괴됐던 서울 진공 작전 이후 제대로 된 연합 작전을 펼친 적도 없었고 일본군에게 각개격파되어 나갔다. 1909년 가을. 일본군이 주목하는 지역이 있었다. 전라도. 특히 전라남도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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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원래 전라도에 관심이 많았다. 곡창지대에다가 서해안을 끼고 있어 경제적 가치 또한 충만해서 일본인 이민들이 일찌감치 들어닥쳤던 곳이었다. 조선인들의 저항도 유별나서 일본인들의 기록에 “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계속 들어왔다. 무슨 서부 개척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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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에서 조선인들의 저항이 자심하고 의병이 들끓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들이 맛이노 덜 봤어 다른 지역이노 러일전쟁 청일전쟁 하면서 우리 일본군의 위력을 봤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이노 아니 본 거야.”  한 번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 잠잠해진다고 여긴 것이다. 거기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기억까지 곁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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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마침내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작전을 개시한다. 말이 남한대토벌이지 호남대토벌, 내지 전남대토벌 작전이었다. 3단계로 구분된 이 작전은 그야말로 빗으로 쓸어내리듯 의병들을 진멸시키는 작전이었다. 남원을 기점으로 서남쪽으로 몰아 광주 고흥 영광 등 전남 일대를 초토화하고 이어서 신안 목포 일대의 다도해 섬들까지 싹 닦아 버리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여기서 이후 일본군의 전매특허라 할 ‘삼광 작전’의 모태가 형성된다. 다 죽이고 다 태우고 다 빼앗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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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전사하거나 체포된 의병장만 103명. 수천 명의 의병들이 전사했고 민간인들 수는 더 헤아릴 수 없었다. 구례에서 이 남한대토벌 작전을 보고 들었던 매천 황현은 이렇게 쓰고 있다.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집집마다 뒤지다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그리하여 도로마다 인적이 끊겨 이웃 마을조차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삼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수 없었다. 강한 자들은 돌진하여 싸우다가 죽었고, 약한 자들은 기어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이르렀으나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이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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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의병은 전멸했다. 이렇게 압도적인 우위로 닦아 세우는데는 도리가 없었다. 많이 항복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동에서 광양으로 이어 해남까지 이어지는 길을 내는 공사에 강제 동원됐다. 참패였다. 정의는 끝내 승리한다는 것은 길게 보면 맞을지 몰라도 작게 보면 터무니없는 오답이다. 대한제국은 우두머리들의 게으름과 몸보신과 아랫 사람들의 피맺힌 투쟁이 엇갈리면서 쓰러져 가고 있었다. 힘내어 싸우던 이들도 지쳐 쓰러져 죽거나 일본군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해산이라는 의병장이 있었다. 그는 장렬하게 전사하지는 않았지만 의연하게 죽었다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라고까지 불리우던 그는 하는 데까지 싸웠지만 한계에 이르자 의병을 해산한다. 그리고 낙향하여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 저 사람이 왕년의 의병장 아무개라는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에게 체포된다. 그러자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오늘이 있을 것을 이미 각오했소.. 죽는 것은 의병 일으키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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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부인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일본군에게 당당하게 손을 내민다.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나는 그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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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빼어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 걸어 주시게. 일본이 망하는 걸 지켜보고야 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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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는 더 흔한 법이다. 영광의 순간보다는 쓰라림이 더 오랜 기억이 되는 법이다. 그럴 때 그 어둠을, 패배를, 쓰라림을 어떻게 맞이하고 버텨내는가는 승리만큼이나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전사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고 끝까지 투쟁의 길에 나서지도 않았던 전해산의 최후는 그래서 “잘 질 줄 알았던”, 한 선비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된다. 남한대토벌 작전은 참혹했고 대한제국 의병의 절망적인 패배로 끝맺었지만 “언젠가 너희들도 망한다. 그걸 꼭 보고야 말겠다.”는 서당 훈장의 말로 맺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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